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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독립투사

분류 : 현대인물

간략설명 : [현대인물] 독립투사

독립투사

박병하(朴炳夏)

: 1847년 광양출신. 1910년 8월. 유생이었던 그는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한일합방의 소식을 전해 듣고 통분하여 단식투쟁에 들어가 만시(挽詩)를 지어놓고 8일만에 순국함으로서 한국침략에 대한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황현(黃玹)

: 1855년 봉강면 서석 출신. 순국지사, 시인, 역사비평가, 어렸을 때 신동이라 할 정도로 총명하여 11세에 한시로서 세인을 놀라게 하였음. 황현은 29세때 1883(고종 20년)에 주위의 권유로 특설 보과거(特設保科擧)에 응시하였는데 초시 초장에서 그의 과안(科案)을 본 당시 시관(試官) 한장석(韓章錫)은 크게 놀라 장원으로 뽑았으나, 그가 몰락한 가문 출신임을 알고 차석으로 떨어뜨렸는데 황현은 당시 과거제의 부패상과 조정의 현실을 간파하고 정사(政事)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음. 되던 해 겨울, 광양에서 구례로 이주하여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아들의 입신을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못해 34세 되던 1888년 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생원이되었음. 그러나 고종말에 청∙일∙러 3개국의 세력 쟁탈전이 이 땅에 소용돌이 칠때 관계(官界)의 부패를 견제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례로 내려가 다시 학문탐구에 전념하였음. 당시 서울 문우(文友)를 비롯한 문부대신(文部大臣)들이 함께 일할 것을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황현이 51세가 되던 1905년 일본의 무력적 강압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이 나라가 본격적인 일제의 식민지체제에 들어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황현은 비분강개하여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나라의 장래를 통탄해 마지않았음. 이러한 울분을 억누를 수 없었던 황현은 친우가 중국으로 망명할 때 동행하려 하였으나 홀로된 종부(宗婦)가 황현에 의지하여 살아가겠다는 간절한 소청으로 결국 중국에 갈 것을 포기하였음. 그는 그후 울분이 치솟을 때마다 중국 역대 지사(志士) 10인의 행적을 시화(詩畵)로써 나타낸 10폭 병풍을 만들어 이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몸가짐을 준엄하게 채찍질하곤 하였음.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이러한 노력도 한계에 부딪혀 황현의 실의와 비분은 극에 달하였음. 그는 자신의 개인적 삶을 자결이라는 최후 수단을 통해 역사적 삶과 일치시킬 필요성을 느꼈으며, 「황성신문」을 통해 망국조약의 시말과 내용을 확인한 뒤 마침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음독, 자결하니 때는 1910년 음력 8월 7일 그의 나이 56세였음. 돌아가신 후 시신을 마지막 살고 있었던 구례군 광의면에 묻혔다가 야밤을 이용하여 봉강재를 넘어, 선친들이 사셨고 출생지인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 안장됨. 유저(遺著)로 매천집(梅泉集)∙매천야록(梅泉野錄)∙동비기략(東匪記略) 등이 있는 바 특히『매천야록』은 국사편찬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열강이 이 땅을 중심으로 한 침략의 간계를 설파하였고, 애국지사 의병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하였음.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 되었으며, 향교 앞 조산등(造山嶝)에 추모비가 건립(1966년)되었으며, 1999년 문화관광부에서 9월의 문화인물로 지정, 2001년 매천황현선생 생가복원, 2004년에는 광양읍 우산공원에 매천 황현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음

김응백(金應伯)

: 1869년 진상면 어치출신. 1908년에 황영문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음. 동년8월 5일 의병 150여명과 함께 칼과 총을 휴대하고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들어가 일본인들의 집을 포위하고 그가족들을 사살하였으며, 같은 해 7~8월에는 군자금을 마련코자 여러 민간인 집에서 필요한 자금을 징수하였는데, 그 이후 왜경에 체포되어 1910년 10월 26일 교수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22일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김상후(金商厚)

: 1870년 옥룡면 상평출신. 김령김씨로 호는 금호(錦湖), 자(字)는 용여(用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호군 오위장 및 무주적상산 참봉.1919. 4. 1 광양군 광양읍에서 장날을 기하여 김석용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음식점에서 30여명의 군중에게 독립만세운동의 당위성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왜경에 체포됨. 동년 4월 26일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광양읍 향교 조산 자락에『5의사 삼일운동 기념비』(1996년 건립)에 김상후 의사의 독립운동 내용을 기리고 있음

황병학(黃炳學)

: 1876년 진상면 비촌출신. 어려서부터 골상이 굵직하고 눈에 광채가 있어 범상치 않은 사람으로 이름났으며, 장성하여 역사를 논할 때 절개를 세우고 의리에 죽은 자를 숭앙하였음. 1906년에 당숙 황순모와 함께 포수 1백여명을 모아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에 일본 선박 수십척이 집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습하여 큰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적과 전투중에 적탄을 맞았으나 동요하지 않고 부하를 독려하여 이름이 호남에 떨쳤음. 그 이후 낙포(현 여수),순천, 고성등지로 전전하면서 항일지사 및 지우들의 구원을 받다가 왜병들의 수색을 피하여 은신하였음. 1919년 가을에는 광주의 기산도와 재거의를 모의하다가 왜병들에게 발각되어 피신하는 한편 광주소재 일본수비대를 야간에 습격하여 무기 10여점을 노획하였음. 그 이후 만주로 건너가 여러곳을 전전하면서 여러차례 왜군과 접전하였음. 1920년 군자금 모금차 국내로 파견되어 압록강을 건너오다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함

황순모(黃珣模)

: 1877년 진상면 비촌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격분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광양군 망덕만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던 중 일본군에 패하여 산골짜기에 피신하였음. 그러나 부모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멀리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귀순하지 않으면 장차 부모와 종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에“뜻도 이루지 못하면서 부모에게 화액만 미치면 무엇하겠느냐?”하고 관아에 나아가 체포되어 그 해 10월 11일 적의 총탄에 맞고 순국하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함.

정성련(鄭星鍊)

: 1879년 옥룡면 추동출신.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광양읍 장날에 단독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계획, 태극기 3매를 만들어 거사일인 장날 장터로 나가서 수백명의 군민들앞에서 태극기를 장대에 메어 머리위에높이들고흔들며,“ 만세만세독립만세”를고창하여시위하다 체포되었음.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정귀인(鄭貴仁)

: 1885년 옥룡면 죽림출신. 광양군 인덕면에서 1919년 4월 4일 서경식∙박용래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동지들과 함께‘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하여 광양군 광양면 읍내리에서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 왜경에게 체포되었음.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서경식(徐璟植∙徐瓊植)

: 886년 옥룡면 산본 출신. 1919년 4월 4일 광양군 인덕면에서 박용래∙정귀인 등과 함께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그와 동지들은‘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등을 만들어 거사준비를 갖추고 광양군 광양면 읍내리에서 1,000여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펴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었음.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백학선(白學善)

: 1887년 진상면 어치출신. 일찍이 황병학 의병부대에 속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음.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마저 해산되기에 이르자 울분을 금치 못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의병이 해산되는 날 홀로 광양읍에 들어가서 관청을 공격하였으며 그 후 동지 두어사람과 더불어 바닷가로 은신, 묘도에 들어가 의병전투 준비중, 갑자기 왜군이 나타나 그의 배를 향하여 쏘았는데 큰 소리로 꾸짖다가 총탄에 맞아 순국 하였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과 199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함.

박용래(朴龍來)

: 1890년 옥룡면 개현출신. 1919년 4월 1일 광양군 인덕면에서 광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서경식∙정귀인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주도하다 왜경에 체포되어 동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김석용(金錫瑢)

: 1894년 출생. 1919년 4월 1일 광양군 광양읍 장날을 기하여 김상후등 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왜경에 체포됨. 동년 5월 10일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김갑곤(金甲坤∙金先坤)

: 1896년 광양읍 도청출신. 일제시대 애국운동가. 왜정시대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광양독서회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음.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건국포장을 추서함.(2005)

황채현(黃彩玹)

: 1896년 진상면 비촌출신. 16세되던 해에 백의회(白衣會)를 조직하여 항일사상을 고취시켰으며, 1919년 3∙1운동시에 태극기를 배포하여 군민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했고,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 지령을 받고 심력(心力)을 다하였으며 1924년 백의회(白衣會)사건으로 징역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김영석(金領錫)

: 1897년 옥룡면 상평 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

임태일(任泰馹)

: 1899년 진월면 송현출신. 애국지사. 1919년 4월 15일 광양군 진월면 송금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서당학생들과 같이 태극기를 제작하며 주민들에게 통문을 보내는 등 준비를 갖추고 이날 진월면 선소리 무적도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려다 일본헌병에게 체포됨. 동년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서성식(徐聖植)

: 1900년 옥룡면 항월 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제4권 마을지편 참조)

서찬식(徐贊植)

: 1900년 옥룡면 하평 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제4권 마을지편 참조)

진신애(眞信愛)

: 1900년 출생. 1919년 당시 광주수피아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년 3월 10일 박애순 교사와 함께 기숙중인 여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수피아 여학생들을 이끌고 광주장터로 나아가서 모여든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었음. 그는 이처럼 선두에 서서 학생들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동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최준수(崔俊秀)

: 1900년 옥룡면 상운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

박용수(朴瑢洙∙朴亨洙∙朴萬權)

: 1901년 출생. 1919년 3월 27일 광양군 인덕면의 만세운동에 이어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난 동년 3월 29일 동지인 김석용∙김영호∙이재갑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모으고자 격문을 작성하여 각 마을마다 붙이게 하여 거사를 널리 전파하려다 일본헌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음. 같은 해 5월 1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10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이기수(李基壽)

: 1901년 옥룡면 하운출신. 애국지사. 3∙1운동당시 옥룡면 운평리에 있는 서당 견용재(見龍齋)에 다니 던 어린 학생으로서 같은 급우인 김영석, 최준수, 서성식, 서찬식, 박봉섭, 나성길등과 함께「선배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 왜놈들에게 끌려갔는데 우리가 어찌 앉아서 공부만 할수 있느냐」고 하면서 1919. 4. 2일에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도중에 왜경에게 검속 당하여 심한 폭행을 당하였으나 7명의 어린 학생들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모두 6개월 내외의 징역을 당하였음. 현재 옥룡초등학교 교내에는 7소년들의 3∙1운동의 의거를 기리는「칠의사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짐.

나성길(羅成吉, 鍾吉)

: 1902년 옥룡면 장암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

박봉섭(朴奉燮, 炳元)

: 1903년 옥룡면 하평출신. 애국지사. 활동내용은『이기수』와 동일 생략

김영호(金永鎬)

: 1904년 광양읍 월평 출신. 1919년 3월 29일 인덕면의 제2차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박용수, 김석용등과 함께 다수군중이 모이도록 격문을 작성하여 널리 전파하려다 왜경에 발각되어 체포됨. 동년 5월 10일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함.

김희곤(金希坤)

: 1904년 광양읍 도청출신.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추서받음(2005). 왜정시대 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전남 경찰국 특별고문과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사망함.

김상환(金相奐)

: 1909년 태인동 용지출신.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항일학생 주동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1929. 11.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때에는 학생들을 지휘하여 항일독립운동 가두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약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금고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 받았음. 또한 광주학생 독서회 사건시 다시 주동자로 지목되어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피검된 학생중 최고형인 징역4년을 언도 받았으나 항소하여 1931년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김지태(金誌泰)

: 1909년 광양읍 도청출신. 1931년 12월 노동계를 만들어 노동자에게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 전남 광양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동지규합 등의 항일활동을 하다 1933년 10월경 왜경에 체포되어 1935년 7월 징역2년에 집행유예 5년(미결 365일 산입)을 받았으며 1년 9개월여의 옥고를 치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건국포장을 추서함.(2005)

김채룡(金彩龍)

: 1921년 출생. 1941년 3월 광양광업소에 근무하면서 김원주∙오호영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뜻을 모으고 비밀결사 백의회를 조직하여 동지규합에 힘썼음. 1941년 8월 일본경도 기독교 청년회의 야간중학부에 진학한 뒤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국내동지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1941년말경 굴천 경찰서에 체포되어 1942년 11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함.

장세영(張世永, 張志永)

: 1922년 광양읍 세승출신. 일본 동경소재 일본대학 예술부에 재학중이던 1943년 2월 동지들과 모임을 갖고 태평양전쟁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할 것을 결의하였음. 이들은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안으로 서울을 근거로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지도 계몽하는 한편 일제가 소련과 개전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호기로 삼아 재미독립운동가및 재일 한국인 학생들과 연계,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여 이에 필요한 자금모집을 위해 그는 동경 거주 외국인들과 교섭하는 등의 항일독립 활동을 하다가 왜경에 체포됨. 그는 1944년 8월 1일 대판 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1년 6월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음.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김주환(金周讙)

: 왜정시대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서회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2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음.

김희로(金希老)

: 광양읍 계곡출신. 1919년 3∙1운동당시 천도교인으로서 서울에 상경.명월관에서 의암 손병희선생과 함께 3∙1운동계획을 논의하고 귀향한후 독립선언서를 군내에 전파하고 거사를 주선하였음. 그는 이른바‘통곡예배’라 하여 빙고등에서 교인과 일반인 수백명을 모으고 우국예배를 올린다음 전원이 합장 통곡하였음. 이 사건으로 순천헌병대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여 귀가 먹어 불구가 되었음.

박경래(朴坰來)

: 애국지사. 활동내용은『박영진』과 동일 생략

박기동(朴基棟)

: 왜정시대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서회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음.

박제웅(朴齊雄)

: 다압면 직금마을 출신. 경남하동군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일진회(一進會)의 반역적 행위에 분개하여 교직을 사퇴한 이후, 국내에서의 만세운동이 국권회복의 성과를 거두지 못함을 보고 1919년 12월에 중국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원으로 활동하였음. 그 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집의 임무를 맡고 다시 귀국하여 나창헌, 이재윤등과 연락을 취하여 광주∙대전등지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음.

박준오(朴準午)

: 왜정시대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서회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음.

여동기(呂東琪)

: 광양읍 인동출신. 자는 현중(賢仲), 1919년 3∙1운동당시 서경식, 박용래, 김상후, 정귀인, 정성련등 오의사와 함께 광양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일제시대 사회주의 운동가로 광양의 소작쟁의를 이끈 주도적 인물임.

장재성(張載性)

: 왜정시대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유학중에 민족의식 고취와 일제에 항거, 독립운동쟁취를 목적으로 조직한 독서회 주동인물로 활동함.

장학규(鄭學奎)

: 왜정시대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독서회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2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음.

정귀석(鄭貴錫)

: 왜정시대 광주학생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형을 받음

정세영

: 일제시대 일본 동경소재 일본대학 예술부에 재학중에 독립쟁취 운동에 헌신할것을 결의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모금을 위해 동경거주 외국인들과 교섭활동을하다 일경에 검속되어 1944. 8. 1 대판 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1년 6월의 옥고를 치름

정자삼(丁子三)

: 1919년 3∙1운동당시 천주교 전도사로서 독립운동 시위군중을 고무 격려하다가 왜경에게 잡혔는데 구류중 다음의 시를 지어 독립의 의지와 지사의 충절을 노래한 애국지사로서 당시 광양인의 독립의지를 웅변하였음. (한시 번역문) 나를 가둔 이문은 언제 열릴까. 아득한 (독립의)소식 하늘같이 멀구나. 갖가지 형벌에도 충렬의 뜻 꺾지 않으리. 온갖 꽃 다투어 필 때면 은은한 향기 예(감옥)서도 맡겠네

최태주(崔泰周)

: 왜정시대 광주학생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여(광주농업학교 5학년)5년간의 형 집행유예를 받음.

최태흠(崔台欽)

: 생년미상 진상면 웅동출신. 진상면 웅동에 거주하다 1907년 의사 백낙구의 창의시 서사문(倡義時誓死文)을 받치고 독립항일운동에 가담.휘하에서 전투하다 백낙구의 순사후 전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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