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문화유적조사
분류 : 개관
간략설명 : 문화유적조사 1)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현황 (1) 문화유적 지표조사 현황광양시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는 1980년대 이래로 여러 차례에 걸쳐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용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영문, 1983,「 광양군 선사유적 조사보고」,『 광양군 문화유적 지표조 사 보고서』, 전남지역개발협의회 이영문, 1983, 「섬진강유역의 선사
1.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 현황
(1) 문화유적 지표조사 현황
광양시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는 1980년대 이래로 여러 차례에 걸쳐이루어졌다. 이러한 내용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중요한 조사성과를 요약해 본다. 우선, 광양군에 대한 종합적인 문화유적 지표조사의 성과는 1993년에 『광양군의 문화유적』이라는 보고서로 간행되었다. 모두 11개 분야(연 혁∙지리적환경∙고고유적∙불교유적∙도요지∙유교유적∙고건축∙민 속∙구비전승∙고문서 및 전적∙천연기념물 및 보호수)로 세분하여 조사 되었다. 이 중에서 고고학적 성과는 지석묘 34개군 224기, 패총 7개소, 유 물산포지 4개소 등으로서, 지석묘가 다수 확인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음으로, 1994~1995년에 걸쳐 옥룡사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가 이루 어져『옥룡사지Ⅰ』보고서가 나왔다. 시굴조사결과, 5개 이상의 문화층, 즉 회색연질토기 및 무문, 태선문, 격자문 등이 있는 와편의 출토층(도선국사 활동 시기부터 고려초), 고려전기의 순청자 출토층, 고려후기의 청자층, 조 선전기 분청사기 출토층, 그리고 조선후기의 백자출토층이 차례로 확인되 었다. 이렇듯 옥룡사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시간적인 단절없 이 지속적으로 문화층이 확인된 것이다. 보고서에는 이러한 시굴조사 성과 및 옥룡사의 연혁과 승려(僧侶), 현재 남아 있는 옥룡사에 대한 지표조사 내용 이외에도, 부록에 선각국사증성혜등탑비(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 통진대사보운탑비(洞眞大師寶雲塔碑)의 원문과 번역본, 선각국사 관련 논 저목록, 광양시의 폐사지와 현존사찰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1997~1998년에 걸쳐 광양시에 산재하고 있는 4대 산성(마로산 성∙불암산성∙봉암산성∙중흥산성)에 대한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져 『광양시의 산성』보고서로 정리되었다. 조사결과, 마로산성과 불암산성은확실히 백제시대에 초축되었고, 중흥산성은 통일신라말-고려시대에 축조 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1999년에는 광양시의 호국항쟁유적에 대한 정밀지 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섬진진(蟾津鎭), 선소(船所), 봉화대(烽火臺), 야철 지(冶鐵址) 등에 대한 현지 조사와 더불어 문헌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1999~2000년에 걸쳐 광양시 전역에 대한 문화유적 분포지도 작성을 위 한 정밀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된 유적을 1/5,000 지형도에 위치와 범위를 표기하였으며, 지정문화재별∙행정구역별∙종류별∙시대별 목록 과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이 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종래에 발견되지 않았 던 구석기 유적 6개소의 확인이다. 그리고 지석묘 8개군 25기가 추가로 확 인되어 광양시에는 모두 43개군 269기가 분포하는 셈이다. 유물산포지는 기존에 9개소가 알려져 있었으나 구석기시대유적을 포함하여 20개소가 새 롭게 확인되어 총 29개소에 이른다. 이외에도 요지(窯址) 3개소, 불상 2구, 선사유적 3개소, 비 5개소 등을 비롯한 52건의 유적을 새롭게 확인하거나 처음으로 자료화시켜 총 222건의 문화유적을 조사하였다.
(2)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황발굴조사는 모두 5개 유적지에서 이루어졌다.
즉 옥곡면 원월리 지석묘 군, 옥룡면 옥룡사지(1~4차), 광양읍 용강리 택지개발지구(1~2차) 및 용 강리 용강 초등학교 신축부지 유적, 광양읍 마로산성(1~2차) 등이다. 이 를 요약하여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광양시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황

2. 주요 발굴조사

(1) 옥곡 원월리 지석묘
광양군 옥곡면 원월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이다. 선유리 하선마을 남쪽 남해 고속도로 변에 6기 의 지석묘가 2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원월천 주변 계 곡에 형성된 좁은 평탄면 중 약간 높은 지점에 해당된 다. 남해 고속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됨에 따라 1990 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모두 5기의 석곽이 확인되었으며 이 중 1기는 상석없이 확 인되었다. 석곽은 할석으로 축조되었고 그 주위에 적 석을 부가하였지만 전형적인 판석형 상석을 가진 3호 지석묘의 하부구조 는 적석이 없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석곽 내부에서 석검∙홍도편 등 이, 주변에서 무문토기∙숫돌이 출토되었고 석촉∙유구석부 등이 지표에 서 채집되었다. 공열구연(孔列口緣)의 무문토기, 홍도편, 일단병식(一段柄 式) 석검, 유구석부 등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중기 이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여천 월내동 지석묘와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특히 가장 거대한 상석을 갖추고 있는 1호 지석묘의 석곽 내부에서 석검 반제품과 적석 외곽 에서 17점의 숫돌이 깨진 상태로 출토되어 피장자가 석기를 전문적으로 제 작하였던 장인(匠人)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2) 옥룡사지
옥룡사지는 옥룡면 추산리에 위치한다. 옥룡사는 광양 백운산의 일지맥 인 백계산의 남단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었던 고찰이었다. 이 절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선승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진 선각국사 도선(先 覺國師道詵)이 35년이나 주석했을 뿐만 아니라 통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지문(志文) 스님 등이 그 법맥을 이어왔고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쌍비(雙碑)와 쌍탑(雙塔)이 전해져 그 이름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옥룡사지에 대한 문헌이 소략하고 절은 조선후기에 이미 폐사되 어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옥룡사지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하여 1994년 10월 14일부터 11월 11일까지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여 개략적인 내용을 확인하였고 그에 따라 1995년 5월에『광양 옥 룡사지Ⅰ-정밀지표조사(光陽玉龍寺址Ⅰ-精密地表調査)』를 발간한 바있다. 이 정밀지표조사에서 옥룡사지‘가’지구의 문화층은 크게 5층 정도 로 파악되었으며, 최하층은 지표면에서 1.7m 아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 고, 또한 여러 곳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① 1차 발굴조사
1차 발굴조사는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옥룡사지의 경역 확인과 더 불어 비석거리의 석비와 부도(쌍비∙쌍탑)가 있었던 곳(탑비전지)을 확인 하기 위함이다. 1차 발굴조사기간은 1997년 1월 20일부터 동년 3월 20일 까지이다.
㉮ 탑비전지(塔碑殿址)
옥룡사 탑비전지에는 선각국사 도선과 통진대사 경보의 쌍비와 쌍탑(부 도)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그 이름이 일찍부터 알려져 왔던 곳이다. 조사 결과 2기의 부도(쌍탑)가 있었던 부도지와 이를 보호하였던 건물지는 확인 되었으나, 비석이 위치했던 지점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부도는 2년전에 시굴조사시에 확인했던 바와 같이 산산히 깨어진 채 출토되었다.
ㄱ. 부도전‘가’(도선국사 부도전)
탑비전지의 북쪽 청주 한씨 무덤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향이다. 부도 전 중심부에 부도(浮屠)가 놓였던 지대석들 가운데 한매가 있다. 이 지대석 상면에는 팔각원당형 부도의 바닥이 있었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이 부 도전 주변에서 상당량의 부도편들이 인위적으로 작게 깨진 채 출토되었다. 부도전은 잔존한 기단면석과 주초석 그리고 와편 등으로 추론해 볼 때 크 게 세 시기에 걸쳐 부도 보호각이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통일신라 말 기, 고려 전기, 조선시대 등으로 구분되어 진다. 도선국사 부도가 과연 옥룡사 현장에 세워졌는가 하는 의문이 학계에서 제기되곤 하였는데 이번에 그 의문이 거의 풀리게 되었다. 비석거리에서 2 곳의 부도전지 유구가 확인되었는데 한 곳은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 한곳은 서편으로 치우쳐 있다. 도선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신라 효공왕 2년 (898) 3월 10일 72세 때에 입적한 직후에 요공선사로 추정되고, 그의 부 도가 세워졌는데 이름이 증성혜등탑이라고 하였다. 중심부에 기단은 잘 치 석된 면석을 사용하고 있고, 건물지의 방향이 남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유구의 초창은 통일신라후기로 추정되며, 유구는 도선국사 부도전으로 추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서편에 치우쳐 있는 부도전에서는 이 고부조(高浮彫)로 부도 기단부 석재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10세기 중반부터 부도의 중대석에 출현하고 있으므로 도선국사의 부도와는 거리가 멀며, 위치상으로 볼 때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948년에 입적한 통진대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따라 서 부도전‘가’는 도선국사 부도전지로 추정되며 조성시기는 도선이 입적 한 89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ㄴ. 부도전‘나’(통진대사 부도전, 洞眞大師浮屠殿)
부도전‘나’는 비석거리의 평탄대지 서측에 치우쳐 있으며, 방향은 동향 이다. 부도전‘가’와는 달리 토사에 의해 깊게 퇴적되어 부도전지 유구가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부도전지 중심부 지대석 아래에 위치하는 적심(績心) 이 2.5m×2.5m 크기의 정방형으로 이중으로 놓여져 있다. 부도전지‘가’ 에서와 같은 부도의 지대석은 유실되고 없다. 적심상부와 주변에는 깨어진 부도편들이 무수히 출토되었다. 건물의 잔존 주초석이나 유물상으로 볼 때 크게 두 시기의 신∙개축이 있었다. 초기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외곽 기단석(980㎝×600㎝)이 놓인 부도전이 있었고, 아울러 북쪽 경사면에 토 사방지용 석축(현재높이 1.1m, 5단)이 확인되었다. 이어서 조선시기에 정 면 1칸, 측면 1칸(340㎝×310㎝)으로 건물이 축소되었다. 이 건물지에서 출토된 부도편 가운데 부도의 형식과 편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것들을 용의 머리, 몸체, 발 등이 표현 된 편들이다. 이 편들은 고조부로 조각되었으며 표현이 아주 사실적이다. 이처럼 부도에서 용의 표현이 고조부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된 예는 주로 10 세기의 팔각당식부도에서 보이고 있으므로 이 부도 역시 같은 시기로 편년 될 수 있으며 형식은 팔각당식으로 추정된다. 부도의 편년이 이와 같이 추 정되므로 이 부도는 948년에 입적한 통진대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 비전지(碑殿址)

탑비가 있었던 지점은 명확히 확인하 지 못했으나 통진대사비가 파괴된 지점 이 부도전‘가’의 남쪽 약 4~5m지점이 므로 대략적인 위치는 추정해 볼 수 있 다. 이 지점의 동쪽으로 연접하여‘ㄱ’자 형의 구획석이 현존하므로 이곳이 통진 대사 비전지(洞眞大師碑殿址)로 추정된 다. 그렇지만 유구들 대부분이 유실(인근주민들이 석재들을 옮겨가서 민가 신개축시에 사용하였음)되어 비전(碑 殿)의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통진대사 비전지는 이처럼 그 위치라도 추정할 수 있으나 도선국사 비전 지는 현재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도선비는 통진비보다 앞에 파괴되면서 그 터도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 수습된 비편
ㄱ. 통진대사 : 비석거리 남쪽 동백숲과 부도전‘가’남쪽 약 4~5m 지점 에서 주로 출토되었다. 수습된 명문 비편은 90여 점이다. 부도전‘가’에 인 접한 지점에서 출토된 비편 중에 명문이 확인된 것은 40점으로서, 이곳은 주변에서 아주 작은 비편들이 상당수 발견된 점에 근거해 볼 때 비석이 존 재했고 파괴된 지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석이 명확히 어느 지점에 위 치했는지 등의 단서를 알 수 있는 하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울러 비 석거리 바로 남쪽에 인접한 동백숲에서도 상당수의 비편(명문 비편포함) 이 수습되었음은 비석이 파괴되고 나서 인위적으로 비편을 주변에 버렸거 나, 자연적으로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ㄴ. 도선국사 비편 : 현재로서는 도선국사비의 명문이 새겨진 비편은 하 나도 수습되지 않았다. 이것은 도선국사비가 땅에 묻혔거나 아니면 다른 곳 으로 옮겨졌을 두가지 가능성을 추론케 한다.
㉱ 출토유물
거의 대부분이 부도편과 비편 및 기와(편)이고, 자기편이나 토기편 등의 여타유물은 드문 편이다. 자기편은 청자편, 분청사기편, 녹청자편 등으로서 소량이다. 기와는 그 양이 많을뿐더러 종류도 다양하다. 암막새나 수막새 이외에도 치미나 착고 등의 특수기와들이 다수 확인된다.
㉲ 도선국사 부도전지에서 출토된 석관(石棺)과 석곽(石槨)

부도전지 중앙에 부도가 놓였던 지대석 1매가 다른 평편석들과 함께 있 었는데 이들 평편석들이 바로 석곽의 뚜껑돌이었다. 이 석곽 뚜껑돌의 상면 이 남아 있는 지대석과 레벨이 거의 같아서 처음에는 석곽이 부도지(浮屠 址)를 파괴하고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석곽내부와 외부를 조 사하는 과정에서 부도의 지대석이 옮겨졌고, 석곽은 처음 유구 조성당시에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선국사 부도전으로 추정된 부도전지‘가’의 중심에 위치하며, 석곽 안 에 석관이 있으며 이차장이다. 석곽의 크기는 길이 153㎝, 너비 70㎝, 깊이80㎝이고 장축방향은 남-북이며 석관을 안치한 후 남단벽을 가장 늦게 막 은 횡구식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석관은 1매석의 원석을 치석하여 관을 만들었고, 뚜껑 역시 1매석이다. 석관의 크기는 길이 95㎝, 너 비 54㎝, 높이 48㎝이다.
석곽과 석관 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없으나, 석곽 해체과정에서 와편들이 출토되었다. 이 와편들은 평 기와편으로 등문양은 선문, 격자문, 무문 등이 시문 되어 있다. 이 편들은 통일신라시대 와편들로 추정된 다. 그리고 석관 내부에 한 사람분의 인골이 남아 있 는데 인골 가운데 두개골은 흔적만 보이지만 척추, 하지 골(대퇴골, 비골), 상지 골(상완골, 요골)등은 잘 남아있다. 부도지 밑 에서 석관이 정식 학술조사에 의하여 조사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다만 일제시기에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진공대사(與法寺址眞 空大師, 940년) 부도지 아래에서 석관이 나와 현재 경복궁내에 부도와 함 께 옮겨져 있을 뿐이다. 이때의 조사기록이 전혀 없어서 어떠한 상태로 이 석관이 출토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옥룡사 부도전지에서 노출된 석 관의 외관 길이가 95㎝에 불과하고 인골에서 화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시신을 육탈한 후 이차장(二次葬, 洗骨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곽의 축조가 도선국사 입적시기와 비슷하게 추정되므로 석관 역 시 그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나 인골의 분석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석관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하기에는 곤란하다.
② 2차 발굴조사
2차 발굴조사는 1997년 11월 5일부터 1998년 1월 22일까지 진행되었 다. 발굴조사지역은 3지구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편의상 현 옥룡사 동쪽 밭 을‘가’지구, 한씨제각이 있었던 주변지역을‘나’지구, 한씨제각의 서쪽밭 을‘다’지구로 명명하였다. 2차 발굴조사에서의 조사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옥룡사는 조선전기 즉 임진왜란전까지 사세(寺勢)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전 사역에 걸쳐 유구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유물들 (기와, 분청사기, 백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가’-3지구에서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 담장으로 둘러싸인 유구는 특이한 형태이다. 방화(防火) 등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석축 담장구조의 건물은 저장 창고 등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유구 내부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분청사기, 순백자, 흑갈유 도기 등은 이러한 성격을 말해 주고 있으며, 이 유물들은‘성화’연간(‘成化’年間)에 소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도자사(陶磁史)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가’-3지구에서출토된‘관음’명‘( 관音’銘) 백자편과‘다’지구에 서 출토된‘성화십일년병신’(1476년)명(‘成化十一年丙神’銘) 암막새, ‘만력십칠년(1589년)’명(‘萬曆十七年己’銘) 암막새 등 명문이 새겨진 기와류와 자기류가 있어 건물지의 편년과 기와∙자기 등의 편년에 지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관음’명 백자편은 조선시대 옥룡사에‘관음 전’(觀音殿)이란 전각이 있어 관음전에서 사용하였던 자기로 추정된다. 넷째,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청자나 조선전기의 백자들은 최상급에 속하 는 것들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곧 옥룡사의 사격(寺格)이 상당하였 음을 보여주는 예이며, 용문(龍紋) 암기와, 연화문과 당초문이 시문된 전 (塼) 등은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③ 3차 발굴조사
3차 발굴조사는 1998년 12월 20일부터 1999년 2월 19일까지 진행되었 다. 발굴조사 구역은 2차 발굴조사에서 제외되었던 곳을 중심으로 하였다. 발굴조사지역은 크게 3지구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편의상 한씨 제각이 있 던 곳의 서편 밭을‘가’지구, 제각의 북쪽 밭을‘나’지구, 제각의 동편 밭을 ‘다’지구라 명명하였다. 조사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건물지의 중첩 및 경작에 의한 훼손으로 건물의 규모를 제대로 파 악할 수 있는 것은 드물었지만, 옥룡사의 사역을 파악한 것이 하나의 성과 라고 볼 수 있다. 조사된 범위에서는 대부분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둘째, 명문와(銘文瓦)가 여러 점 출토되어 문헌자료가 빈약한 옥룡사의 연혁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지구에서 출토된‘옹정오 년(1727년)정미…일옥룡사…’(擁正五年(1727년)丁末…日玉龍寺…’) 銘 의 암막새는 문헌과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옥룡사지를 출토유물로 직접 확 인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아울러 18세기 전반까지도 옥룡사가 일정한 사세(寺勢)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치’명(‘松峙’銘) 암키 와는 기와를 만든 장소를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근에‘솔재’가 있어 조선시대에 옥룡사에 사용된 기와의 수급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자료이다. ‘화주응진…만력십칠년기축삼월일’명(‘化主應 眞… 萬曆十七年(1589년)己丑三月日’銘) 암막새는 1997 년 2차 발굴조사에서도 출토된 것이어서 임진왜란전에는 옥룡사에 대규모 불사(佛事)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와당이 출토된 지점에서 불에 탄 흔적이 확인되기에 임 진왜란 당시에 화재가 발생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러한 전란으로 인하여 옥룡사는 점차 쇠락해 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④ 4차 발굴조사
4차 발굴조사는 2001년 8월 7일부터 동년 12월 4일까지 진행되었다. 조 사지역은 6지구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편의상 민가 동쪽 밭을‘A’지구, ‘A’지구의 북쪽 밭을‘B’지구, 민가 뒤쪽 밭을‘C’지구,‘ C’지구의 서쪽 이면서 제각이 있었던 주변지역을‘E’지구, 현 옥룡사의 동남쪽 밭을‘D’ 지구, 가장 아래쪽 밭을‘F’지구라 명명하였다. B-E지구는 유구의 중복 상이 심하여 건물의 구조와 규모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조사성과는 다 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의 건물지 여러 동(棟)과 통일신라말~고려초의 연못터 1 개소를 확인하였으며 다량의 자기류(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와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옥룡사지는 좁은 공간이라도 평탄지가 있으면 건물지나 관련 유구가 확인된다. 이는 사지(寺址)의 절대 면적이 좁아 공간을 최대한 활용 한 결과이다.
둘째, 조선시대의 건물지는 유구의 중복과 훼손이 심하여 정확한 규모와 형태를 규명하기는 곤란하다. 건물지의 장축은 지형(등고선)과 일치하기 보다는 동-서 장축의 정남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옥룡사지가 입지한 곳이 평탄지가 아니라 경사지라는 점에서 축대가 많이 시설되어 계단식으로 건 물이 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A지구의 경우는 2개의 조선시대의 축대가 가까이 인접하고 있어, 개축이나 증축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옥룡사 중심지 구에서 축대가 발견되었으므로 이를 중심으로 유구를 파악하면 금당지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B~C지구에서는‘송천사강희이십일년임술(1682년)오월일’(‘松 川寺康熙二十一年壬戌五月日’), ‘옥룡사’(‘玉龍寺’), ‘송치’(‘松峙’) 등 의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앞선 발굴조사에서 확인된‘성화십일년 병신’(‘成化十一年丙神’, 1476년), ‘만력십칠년 기축’(‘萬曆十七年己丑’, 1589년), ‘강희이십년’(康熙二十年’, 1681년), ‘옹정오년’(擁正五年, 1727년) 등의 명문 기와까지 종합해 보면 폐사(1878년)되기 전의 옥룡사 의 변천사를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15-16세기에 융성하였던 사세(寺 勢)가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은 후인 17세기후반과 18세기전반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송치’명(‘松峙’銘) 평기와는 2-3차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송치’(松峙)는 기와를 만든 장소를 언급 하는 것으로 판단되며 인근에‘솔재’가 있어 옥룡사에 사용된 기와의 수급 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넷째, 탑의 옥개석 일부가 확인되어 앞선 조사에서 확인된 탑재와 더불어 옥룡사의 탑을 복원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들 탑재는 1923년에 청주 한 씨 제각을 만들면서 주춧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금반에 발견된 옥개석 중 1매는 깨진 채로 제각 앞의 축대의 일부로서 이용된 것이다.
다섯째, 연못은 옥룡사지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인 절 입구에 위치한 다. 유물로 보면 통일신라말~고려초의 비교적 짧은 시기에 한한다. 연대상 으로 옥룡사의 창건연기설화(創建緣起設話)에 등장하는 연못으로 판단된 다. 연못의 범위가 현재의 통행로까지 뻗고 있어, 당시의 통행로는 지금과 달리 연못의 동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평면형태가 세장방형 에 가깝고, 장축이 등고선과 직교함은 굴착이 용이한 계곡흐름 방향을 택했음을 의미한다. 연못의 축조는 기반토인 황갈색 마 사토를 70-80도 정도의 경사로 굴착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별도의 시설이 관찰되지 않는다. 현재에도 물이 계속 솟아나는 관계로 뻘상태가 유지되어 당시의 유물, 특히 목재가 부식되지 않고 출토된다. 비교적 짧은 시기동안에만 사용되다가 폐기된 후, 연못의 북쪽은 축대와 석렬을 조성하여 공간이 재이용되고 있다. 창건연기설화에도 습지를 메우고 땅을 다졌다는 내용이 있다.
여섯째, 연못 내의 출토유물로는 토기, 기와, 전(塼), 철제도 끼, 해무리굽 청자, 목기(木器), 벼루편 등이다. 토기는 대형의 항아리가 주종이며, 일부 소형토기는 인화문토기의 기형을 이 룬다. 평기와는 등문양이 격자문, 사격자문, 선문, 수지문과 장 격자문이 결합된 복합문 등으로 구분된다. 통일신라말~고려초에 걸쳐 비교적 짧은 시기동안에 사용된 이들 기와를 분석해보면 이 지역 의 기와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막새와는 연화 문수막새와 당초문암막새가 조합을 이룬다. 목기로는 바가지와 함지가 출 토되어 주목된다. 기형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당시에 실제 사용하던 생활용 구로서 의미를 가지며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청자는 해무리굽 청자 에 한하여 우리나라 초기 청자 연구에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3) 용강리 택지개발지구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 일원(458,745㎡)은 용강지구 토지구획 정리조합 에서 시행하는 택지개발 조성공사 지구이다. 이 사업지구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공사구역 내와 주변에는 지석묘 4개군 10기, 유물산포지 3개소, 고분 군 2개소 등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지석묘 3개군 9기와 유물산포지 2개소는 택지개발 구역 내에 분포하고 있어 2차례의 발 굴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① 1차 발굴조사
1차 발굴조사는 1999년 12월 21일부터 2000년 3월 21일까지 이루어졌 다. 조사지역은 2개 지구로 나누어지는데, 기두마을과 관동마을 뒤편 밭이다.
㉮ 용강리 기두‘가’지구
이 유적은 용강리 기두마을에서 동쪽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저평한 구 릉의 하단부이며, 조사전에는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유적의 내 용은 지석묘 4기 및 석곽묘 34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3기∙수혈유구 3기, 삼국시대 주거지 1기, 통일 신라시대 석곽묘 2기 등이다. 지석묘는 굄돌이 있는 남방식이며, 3호는 매장주체부가 없이 묘표석의 기능을 했다고 판단된다. 지석묘의 하부구조는 석곽형이 대부분이고, 3기 만이 석관형이다. 대부분 뚜껑돌이 있으며, 일부는 2중개석이다. 바닥석은 맨바닥인 경우와 판석을 2~3매 깐 경우, 할석을 깐 것 등으로 구분되지만 주류는 판석 2~3매를 깐 것이다. 벽석의 축조는 쌓은 것과 세운 것으로 대 별되지만, 단벽의 경우에는 대개 판석을 세웠다. 매장주체부는 지하형이 다 수이고, 지상식은 극소수뿐이다. 석곽의 장축방향은 대개 등고선과 일치하 는 남-북 방향이지만, 2기의 석곽은 등고선과 직교한다. 청동기시대 분묘 는 비교적 좁은 공간안에 매장주체부가 집중되어 있으며, 3개의 군집으로 다시 세분해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류(무문토기편, 홍도편), 석기류(돌끌 1점, 마제석검 2점, 마제석촉 2점), 小玉3점 등 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타원형이며, 중앙 에 타원형 작업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주거지이다. 주 거지의 장축은 등고선과 나란한 남-북 방향이다. 그런 데 주거지간에 중복되었거나 청동기시대 석곽묘와 주 거지가 겹쳐진 양상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특히 청동기 시대 주거지를 파괴하고 청동기시대 석곽묘가 축조되 어 있어 상호 선후관계를 명확히 살펴볼 수 있는 중요 한 자료가 있다. 유물은 마제석검, 마제석촉, 유구석부편, 숫돌 등의 석기류 와 무문토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말 각방형으로서, 경배(經杯) 1점 외에 철기편과 경질토기편들이 수습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석곽묘는 2기로서 지상식이다. 벽석은 1단만 남았다. 개석 은 유실되었고, 바닥석은 10~20cm 크기의 소할석을 1겹 정도 깐 형식이 다. 유물은 인화문 토기가 6점 출토되었다.
㉯ 용강리 관동‘가’지구
이 유적은 용강리 관동마을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구릉이 며, 조사전에는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유구(遺構)는 석곽묘 30기, 주거 지 6기, 조선시대 민묘 5기 등이다. 유적은 구릉정상부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는 반면에 동남쪽 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석곽묘는 그 출토유물의 양식으로 보아 백제말에서 통일신라시대 초기 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혈식(竪穴式)과 횡구식(橫口式)이 혼 재되어 있다. 석곽묘는 대개 등고선과 직교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북침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개석(蓋石)은 경작 등으로 인하여 남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석곽의 바닥시설은 맨바닥도 일부 확인되지만 대개는 소할석을 깔 았다. 1호 석곽묘는 바닥에 구(溝)를 파서 배수구를 만들고 그 위에 백제시 대 평기와를 전면적으로 깐 특이한 경우이다. 이러한 예는 매우 드문데, 바 닥에 깐 기와는 내면에 거친 승문(繩文)이 있어 마로산성에서 출토되고 있 는 백제시대 후기의 기와와 동일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 루어 보아 용강리 유적은 바로 옆에 있는 마로산성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 을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시대 석곽묘에서는 단경호∙완∙병∙개배 등의 토기류와 관못(棺釘), 철제도끼 1점, 철제낫 1점, 토제 방추차 2점, 평기와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석곽묘에서는 인화문토기 11점이 출토되었다.
주거지는 모두 6기로서 청동기시대(3기)와 삼국시대(3기)로 구분된다. 청동기시대의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장방형(4호)과 타원형(1∙6호)의 2가 지이다. 타원형 주거지는 중앙에 장타원형 작업공이 있는 송국리형 주거지 이다. 주거지 출토유물은 석기류(석착, 방추차 3점, 석도, 숫돌, 마제석촉) 와 무문토기편 외에 환옥 1점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주거지는 말각장방 형으로서 4개의 주공이 주거지 내부에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유물은 숫돌, 토기류(적갈색 연질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 외에 토제방추차와 모자곡옥(母子曲玉)이 각 1점씩 출토되었다. 모자곡옥은 우리나라에서 출 토된 예가 아주 빈약한 반면, 일본에서는 5세기경 제사유적에서 다수 출토 되고 있어 앞으로 상호 관련성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민묘는 모두 5기로서 조선전기에 해당한다. 모두 토광묘로서 내부에 목 관을 안치했으며, 장축이 등고선과 직교한다. 유물은 분청사기와 백자 등 4 점의 자기류, 청동합∙청동 수저∙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② 2차 발굴조사
조사기간은 2000년 10월 27일부터 2001년 4월 30일까지이며, 1차 발 굴조사와 마찬가지로 관동과 기두의 2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조사가 이루 어졌다.
㉮ 관동‘나’지구
관동‘나’지구는 용강리 관동마을의 바로 북쪽에 인접한 저평한 구릉의 말단부로서, 조사전에는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확인된 유구는 주거지 128기, 수혈유구 12기, 고상가옥 4기, 백제~통일신라시대 석곽묘 7기, 구상유구(溝狀遺構) 1기, 조선시대 민묘 48기 등이다.
ㄱ. 주거지
발굴된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철기시대후기(원삼국시대), 삼국시대로 구 분지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14기를 차지하고 나머 지는 대개 3-4세기에 해당하는 주거지들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송국리형으로서, 평면형태가 원형과 말각방형으로 대별된다. 내부시설로는 중심부의 작업공과 작업공 내∙외에 주공(柱孔, 기둥구멍)이 있는 형태이다. 주거지 출토유물로는 무문토기, 마제석촉, 숫 돌, 방추차(토제 및 석제), 석기편 등이다.철기시대후기(원삼국시대) 주거지는 원형과 타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원 형이 앞선 시기로 판단된다. 원형의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한편 타원형계의 주거지에서는 경질무문토기 외에 격자타날된 적 갈색연질토기가 공반하는 양상을 보인다.
한편, 4~5세기대의 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가 원형, 타원형, 반원 형, 방형계의 주거지로 구분되는데, 타원형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원 형, 타원형, 반원형 주거지가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인데, 대개 벽구(壁溝) 와 배수구 시설이 확인된다. 출토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보다는 회청색경 질토기의 비율이 높다.
ㄴ. 석곽묘

석곽묘는 관동‘나’지구의 북동쪽 구릉 정상부 사 면에서만 7기가 확인되었다. 석곽묘의 장축은 등고 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두향은 북쪽으로 추정된 다. 백제기와편이 출토되는 백제시대의 석곽묘와 인 화문토기가 출토되는 통일신라시대 석곽묘로 구분 된다. 석곽의 축조상태를 보면 수혈식과 횡구식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6기 중에 3호 석곽묘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데, 한차례의 추가장이 보인다. 그리 고 3호 석곽내에서는 관못이 확인되기에 목관의 사용을 시사한다. 석곽의 바닥시설은 맨바닥도 있지만 대개는 천석이나 소할석을 깔았다.
ㄷ. 고상가옥(高床家屋)
고상가옥은 모두 4기가 확인되었다. 구릉정상부보다는 조금 아래쪽의 사 면부에 입지한다. 모두 2칸×2칸의 규모로 정형화되어 있다. 이 가운데 3 호는 고상가옥에 오르기 위한 보조기둥까지 갖추어 규모가 큰 편이다. 주칸 거리 200cm, 기둥직경 80-112cm이다. 고상가옥의 중심연대는 3-4세기 대로 추정되는데, 그 기능은 창고, 망루 등으로 상정해 볼 수 있다.
ㄹ. 민묘
민묘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해당하며 48기가 조사되었다. 민묘의 장축은 등고선과 일치하는 남-북 혹은 북동-남서 방향이 대부분이다. 출토유물 로는 분청사기, 백자, 청동합, 벼루, 청동수저, 철제가위, 청동젓가락, 관못 등이다. 장벽의 한켠에 부장갱이 별도로 있는 민묘는 부장품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유물은 주로 서쪽이나 동쪽 장벽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 용강리 기두‘나’지구
기두‘나’지구에는 지석묘 4기와 유물산포지 1개소가 있었다. 유물산포 지에 대한 조사결과 4~5세기대의 주거지 48기와 수혈유구 6기, 청동기시 대 석곽묘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군의 동쪽으로 지석묘군이 확인되 었다.
ㄱ. 지석묘 및 청동기시대 석곽묘
조사전에 4기의 상석(上石)이 있었다. 조사를 진행하면서 4기의 지석묘 이외에도 지석묘와 관련된 17기의 석곽묘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지석묘와 석곽묘는 대개 등고선과 나란한 동-서 장축 방향을 이루고 있었다. 4기의 지석묘 가운데 1기의 지석묘 상석(4호)은 이동되었다. 이동되지 않은 3기 의 지석묘 가운데 1기(3호)만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었기에 나머지 2기는 묘표석(墓標石)으로 판단된다. 석곽묘들은 돌로 정연하게 축조된 것도 있 지만, 기반토가 결이 지는 풍화암반층인 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매장주체부 가장자리로 할석 수매를 형식적으로 돌린 암광묘(岩壙墓)적인 성격도 보 인다. 지석묘와 주변의 석곽묘는 3~4개 정도의 군집성이 보이기에 주목된 다. 신전장이 가능한 6호 석곽묘에서는 유경식 마제석검 외에 玉10점이 출토되어 다른 석곽묘와는 차별성이 보인다. 출토유물은 마제석검(편) 4 점, 마제석촉(편) 3점, 석착 1점, 무문토기편, 홍도편, 환옥 2점, 관옥 8점 등이다.
한편, 기두‘나’지구 12호 주거지 아래쪽 경사면에 석곽묘 1기가 독립되 어 존재한다. 풍화암반층을 굴착하여 축조하였는데, 석곽의 장축은 북동- 남서방향으로서 등고선과 일치하고 있다. 입지한 곳이 경사가 다소 급한 곳 이고, 적석이나 지석이 없기에 원래부터 상석이 없었다고 추정된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166cm, 너비 35cm, 깊이 49cm이다. 출토유물은 흑도(편) 이 외에 마제석촉이 4점인데, 삼각만입석촉과 이단경식석촉이어서 주목된다. 유물상으로 보면 이 석곽묘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하기에, 지석묘 출현 기의 청동기시대 묘제에 대해 접근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ㄴ. 수혈유구
수혈유구는 모두 6기가 확인되었는데, 주거지들과 혼재되어 있다. 장축 은 대개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이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이 많다. 대부분 바닥면이 경사져 있어 주거공간으로는 적합하지 못하다. 따라서 채토나 다 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은 적갈색연질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가 공반되는 양상이 주류이 다. 다만 1호 수혈유구에서는 원형점토대토기편, 토기 대각과 더불어 소토가 확인되었다.
ㄷ. 주거지

기두‘나’지구에서는 모두 48기의 주거지가 조사되 었다. 관동‘나’지구와 비교하면, 그 형태가 완전한 것 이 거의 없고, 일부 윤곽만 확인되는 것이 많다. 주거지 는 구릉정상부보다는 양지바른 동남쪽의 사면에 입지 하고 있다. 경사가 급한 관계로‘ㄴ’자로 굴지(掘地)하여, 수혈이 비교적 깊은 편이다. 일부 주거지는 화재주거지로서 바닥에 탄화된 목재가 잘 남아 있다. 관동‘나’지구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늦은 4~5세기대의 주거지인 데,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대부분 원형이나 타원형이다. 말각방형의 평면형 태도 일부 있는데 비교적 늦은 시기로 편년된다. 출토유물은 적갈색 연질토 기도 있지만 회청색 경질토기의 비율이 높다. 회청색 경질토기 중에는 잔 (盞),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완형토기( 形土器) 등의 기형이 확 인된다.
이와 같이 2차 발굴조사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많은 수의 주거지(176기)가 확인됨으로써 주암댐수몰지구 나 여수 화장동 등 인근지역과의 비교를 통하여 전남동부지역의 주거변천 사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4) 용강리 용강초등학교 신축부지
이 유적은 광양시 광양읍 용강리 607-1번지 일대로서 용강초등학교 신 축부지에 자리하며, 1999-2001년에 걸쳐 조사된 용강리 택지개발지구의 유적과는 같은 능선상으로 이어진다. 발굴조사기간은 2002년 4월13일부 터 5월 22일까지이다.
조사결과, 주거지 24기, 수혈유구 5기, 구상유구 1기, 청동기시대 주공열 2기, 삼국시대 석곽묘 1기, 노지 2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 가운데 청동기 시대 주거지가 21기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확인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모두 중앙에 타원형수혈을 배치하고 그 주변 에 중심주공을 설치한 송국리형 주거지로 그 축조와 폐기방법은 비교적 정 형화되었으며, 일부 주거지에서는 증∙개축의 흔적이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제형, 방형, 말각 방형, 타원형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중 말각 (抹角)을 이루는 방형계통의 평면형태가 대부분을 차 지한다. 주거지의 주축방향은 대부분이 남-북 방향으 로 등고선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 로는 타원형수혈과 중심주공(柱孔), 노지(爐址), 출입 시설, 구(溝) 등이 있다. 타원형수혈에서는 석기제작 이 이루어졌을 것이며, 타원형수혈 내부는 석기제작 에 관련한 물이 저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2기의 청동기시대 주공열이 확인되었는데, 1호는 장방형이며, 2 호는 원형으로 추정된다. 1호는 1×6칸으로 전체 규모가 1.8×7.4m로서, 창고나 주거공간으로 사용된 고상가옥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된 석기류의 종류는 석촉(石鏃), 석착 (石鑿), 유구석부(有溝石斧), 석도(石刀), 망치돌, 숫돌, 연석, 미완성 석제 품 등이다. 이들 유물은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80여 점, 석촉 등의 가 공된 유물이 40여 점으로, 전체 석기류 중 석기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를 차지한다.
한편 철기시대와 삼국시대의 주거지는 3기가 조사되었다. 조사된 주거지 의 평면형태는 모두 방형계통이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현재 2개의 주공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원래는 4개의 주공이 있어 4개의 기둥이 받치 는 주거지로 판단된다. 유적의 동쪽에서는 백제시대 석곽묘 1기가 조사되 었는데, 대부분 유실되어 바닥석과 벽석 1단 정도가 남아있다. 바닥에는 백 제시대의 기와가 일부 깔려 있다.
(5) 마로산성(馬老山城)
① 마로산성 1차 발굴조사
광양시에서는 마로산성의 정비∙복원에 앞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산성 의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1차 발굴조사는 2001년 9월 18일 ~ 2002년 2월 26일까지 이루어졌다.
마로산성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와 용강리, 죽림리 등 3개리의 경 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마로산 성의 정상부는 평탄한 편이나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는 가파른 자연 경사면을 이루고 있어 천혜의 요새이다. 산성은 마로산의 정상부와 능선에 걸쳐 형성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 양만과 순천 왜성이, 북서쪽으로는 광양읍이, 남동쪽으로는 광양-진주간 남해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남서쪽 약 6.7km 지점에는 백제시 대 석성으로 조사된 순천 검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총 길이가 550m 정도 인 마로산성은 면적이 약 18,945㎡이다. 남-북방향에서 서쪽으로 약 30 정도 치우친 말각장방형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남쪽과 북쪽 모서리가 높고 성의 중심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마안봉(馬鞍 峰) 형태의 지형이다. 마안봉은 말안장과 같이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록 하게 낮게 된 지형으로 산성 축조에 유리한 지형이다. 1차 발굴조사의 성과 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7동, 수혈유구 4기, 문지 1곳, 치 2개소 등의 많은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들이 조사 되었다.
둘째, 출토유물로는 기와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막새는 15여 종에 이르는 수막새가 출토되었는데, 막새면에 시문된 문양이 우리나 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아주 특이하다. 셋째, 산성에서는 드물 게 3점의 동경이 출토되었다. 2점은 원형이고, 1점은 방형 동경이다. 원형 동경은 가운데 1점은‘왕가조경(王家造鏡)’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주 목된다.

넷째, 성의 둘레는 약 550m 정도로, 성벽은 내∙ 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았으며, 체성의 너비는 550cm정도이다. 이 러한 축성법은 순천 검단산성과 여수 고락산성 등 과 동일하여 전남 동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전형 적인 백제시대 후기의 양상을 띠고 있다.
다섯째, 길이 8~10.1m, 너비 2.6m 규모의 치 (雉) 2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장방형의 축조형태로 보아 통일신라말~고려초의 유구로 판단된다. 전 남지방 산성 발굴조사에서 치가 확인된 것은 처음 인데, 특히 삼국시대에 초축된 산성에서 후대에 부 가된 치의 구조가 조사되어 시대에 따른 산성의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좋은 자료로 판단된다.

여섯째, 『삼국사기』에 근거하면 광양지역은 백제 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중반기(8세기 중엽)까지 ‘馬老縣’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번 발굴조사 에서‘馬老官’이라는 명문와가 다량 발견되어 마로 산성이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治所임이 증명된 셈이다.
② 마로산성 2차 발굴조사
1차 발굴조사는 마로산성 내부 평탄면 가운데 극 히 일부만 조사되었고, 또 조사된 지역도 유구의 중복과 퇴적이 심하여 최 상층의 유구만 조사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성곽의 기본 구성요소인 저장공, 집수정, 문지 등의 유구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2차 발굴조사는 미조사지역과 하층 유구에 대한 보완조사를 실시하여 마로산성에 대한 전 체적인 현황과 정확한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조사기간은 2002년 10 월 25일~2003년 1월 7일까지이다. 조사성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사 결과 건물지 4동, 문지 2곳, 집수정 4곳, 10여기 이상의 수혈 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출토유물 등을 통해 볼 때 마로산성은 백제시대에 초축되어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 흥 남양현성과 여수 호랑산성을 제외한 전남 동부지역의 다른 백제 산성들 이 주로 초축시기인 백제시대에만 사용되고 폐기된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둘째, 문지(門址)는 남문지와 동문지 2곳이 확인되었다. 남문지는 평문 식 문에서 현문식 문으로 개축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여수 고락산성의 남문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또 동문지와 연결된 북쪽 벽석에 들여쌓기 기법이 잘 남아 있어 동문지 역시 개축 되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 출토 유물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자기류 등 비교적 다양하다. 기와류에 있어서는‘馬老官’명문와가 집중적으로출토되고있다.『 三國史記』에근거하면광양 지역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중반기(8세기 중엽) 까지‘馬老縣‘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治所의 명칭이 기와 에 새겨져 문헌과 유물이 부합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공반되고 있는 토기류는 9세기대의 유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馬老’라는 지명은‘縣’의 명칭이‘馬老縣’에서 ‘晞陽縣’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해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자기류는 다른 유물에 비해 상대적으 로 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제 해무리굽 청 자∙백자편만 출토되고 있어 주목된다. 해무 리굽 청자편은 중국의 월주요 계통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근의 광양 옥룡사지에서도 출 토되고 있다. 해무리굽 백자편은 완도 청해진 유적을 제외하고는 전남지방에서 출토예가 드물다. 이와 같은 중국제 자기 류는 당시의 대외적인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