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방유적진(鎭)∙보(保)
분류 : 관방유적
간략설명 : 진(鎭)∙보(保) 1) 섬진진지(蟾津鎭址) (1) 섬진진의 설치 섬진진(蟾津鎭)은 섬진강 하구의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 마을에 위 치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설치되어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직접적인 관 할을 받던 소규모의 수군진(水軍鎭) 이었다.섬진은 본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 신은 섬진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왜적의 내
1. 섬진진지(蟾津鎭址
(1) 섬진진의 설치
섬진진(蟾津鎭)은 섬진강 하구의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 마을에 위 치하고 있다. 조선후기에 설치되어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직접적인 관 할을 받던 소규모의 수군진(水軍鎭) 이었다.
섬진은 본시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 신은 섬진 지역에 군사를 주둔시켜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였고, 전라감사 이 정암은 종3품의 첨절제사를 섬진에 주둔시킴으로써 진관체제하의 거진으 로 정식 편입하고자 건의하여 조정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실 제 설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이로써 요해처로서의 섬진 지역이 지 니는 의의는 충분히 드러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섬진 지역에 설 진의 단서가 구체적으로 마련된 것은 선조 36년(1603) 이래의 일이었다. 섬진에는 진의 개설에 앞서 이미 모군(募軍)과 더불어 도청(都廳, 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18세기말에 쓰인『光陽邑誌』에 따르면, 당시 섬진진에는 창고를 관리하기 위한 한 채의 아사(衙舍) 외에는 창고 건물만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선조 36년에 조정에서는 섬진에다 도청창 을 세운 다음 그것을 지키고 관리하기 위하여 민간인 자원병으로 구성된 모군을 두었었는데, 그 규모가 커져가자 숙종 3 1년(1705)에 마침내 진으 로 승격시켜 진관체제하의 제진에 정식으로 편입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 섬진진의 조직과 운영 섬진진은 조선후기 내내 삼도수군통제영의 유일한 직할진이었다.
조선후 기에는 통제사가 경상우수사를 겸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통제 사는 경상우수사로서 가덕진관(加德鎭管)이나 미조항진관(彌助項鎭管)과 같은 경상우도에 속해 있던 여러 수군진들을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때 전라좌수사 휘하에 있던 전라도의 광양 지역에 수군 진보를 설치하고 서, 어떠한 진관에도 속하지 않도록 한 가운데 그것을 통제사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에 두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조치이었음이 분명해 보인 다. 이 당시 섬진진이 여타의 수군 진보와는 구별되는 남다른 의미를 지니 는 가운데,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던 군진이었 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섬진진은 여러 진 가운데서도 소모진(召募鎭)에 속하는 수군 진보이었 다. 소모진이란, 해상 방어체제의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재정 형편상 유방군 (留防軍)을 상시적으로 주둔시키기 어려웠던 지역에, 인근의 지역민들을 모군으로 소집하여 수비하도록 시키었던 특수한 군진이었다. 섬진진을 지 휘 통제하도록 파견된 것은 권관(權管)이 아니라 별장(別將)이었다. 6품 내지는 종8품의 품계를 지닌 별장으로 하여금, 섬진진을 총괄하도록 책임 을 맡기었던 것이다. 또한 섬진진에는 이 별장의 통솔 아래 입번(入番)하는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3~8월의 바람이 잦아드는 시기에는 40명씩, 그 리고 9~2월의 바람이 높아지던 시기에는 20명씩, 3개월 동안 입번한 다음 교체하였다.
섬진진은 군사적인 측면에서와 함께, 더욱이 재정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이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던 수군 진보였다. 처음 진을 개설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도청(都廳, 倉)이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이미 그와 같은 측면이 드러나고 있거니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져 갔던 것이다. 섬진진에는 공해(公)인 서해관(誓海館) 외에, 병량창(兵糧 倉)을 비롯하여 진창(鎭倉), 총창(銃倉), 군기고(軍器庫), 육물고(陸物庫), 화약고(火藥庫) 등 여러 창고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섬진진에 소재하던 관 아 건물의 대부분이 창고사(倉庫舍)로서, 그와 같은 건물의 배치마저 진이 차지하고 있던 경제 재정적인 측면에서의 비중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섬진진에서는 우선 전라 감영과 삼도수군통제영으로부터 위임받은 환곡 을 관리하여야만 하였다. 통영(統營)의 경우 17세기 초 이래 관내의 여러 군현에 다수의 창고를 개설하여 재정의 원할한 운영을 도모하였다고 하는 데, 그 가운데서도 섬진창은 무안 고하도의 당곶창(唐串倉)과 더불어 아주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통영 이외의 지역에 소재하던 통제영 관할하 의 외창(外倉) 10곳 가운데, 당곶창과 섬진창만은 경상우도를 벗어나 전라 도에 소재하고 있었다. 한편 통영의 외창이 자리한 군현의 양민들에게는, 환폐(還幣)와 민역(民役)의 가중이라고 하는 매우 무거운 부담이 지워졌 다. 통영의 외창 중 가장 원거리에 있던 당곶창과 섬진창에서도 그것은 매 한가지였다. 당곶창의 경우 인근 군현인 나주와 무안 및 영암에서의 환폐 침학이 너무 가혹하여, 18세기 들어 그 이설 또는 혁파가 자주 논의되다가 19세기에 가서 마침내 혁파되었다. 반면에 섬진창은 당곶창과 달리 고종32년(1895) 통제영이 폐영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호남 지역에서의 무곡 (貿穀)과 통영 수용물(需用物)의 원할한 수납을 위하여 개설한 섬진진 및 그 창고가 지녔던 중요성을 암시하는 사실이 아닐 수가 없다. 통영의 외창 들이 대개 6~10칸 규모의 창고 건물을 지녔었던 데 비해, 19세기 중반의 섬진창은 그 창고사가 무려 20칸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또한 통영 관하에 있던 여타의 군진이나 속읍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섬진진과 그 창고의 독특 한 위상을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닌가 한다.
환곡 외에도 섬진진에서는 장세(場稅)나 해세(海稅)와 같은 막대한 세입 원을 갖고 있었다. 진의 설치 이래 섬진진에서는 두치장(豆恥場)을 개설하 여 직접 장세를 거두었다. 지리산권을 포함한 호남과 영남 일원의 각종 물 산이 섬진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활발히 거래되는 중심지이었기 때문에, 섬 진진에서 거두어들이는 장세의 액수는 적지 않은 것이었다. 섬진창의 별칭 이 두치도청창(豆恥都廳倉)이었다는 사실에서, 섬진진의 운영과 관련하 여 두치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한편 섬 진진에서는 어 선세(漁船稅) 등을 포괄하는 이른바 해세의 징수액도 만만 치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섬진강을 내왕하는 각종 선박으로 부터 징수하는 선박세는, 장세와 더불어 섬진진의 주요한 세입원을 구성하 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피었던 거와 같은 재정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섬진진의 역할 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재정 운영상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 다. 임진왜란 당시 입증되었던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 으려니와, 나아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섬진진은 못지않게 비중있는 역할 을 수행하던 수군진이었던 셈이다.
(3) 섬진진의 폐쇄
섬진진이 폐쇄된 것은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 때의 일이었다. 당시 각 군문을 폐합하여 군무아문의 소속으로 일원화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이 폐영되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그 속진이었던 섬진진도 함께 폐쇄되는 운 명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후 섬진진이 소재하던 지역은 다시 광양군의 관 할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현재 광양시 다압면에 그 터가 남아있다.
(4) 섬진진의 의의

섬진진이 설치된 지역은 군사적으로 요충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임진왜 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그곳에 군사를 매복 주둔시켰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조 36년(1603)에 도청(都廳, 倉)을 개설하여 모 군으로 하여금 주둔케 하다가, 마침내 숙종 3 1년 (1705)에 별장진(別將鎭)을 설치함으로써 정식으 로 진영체제하의 제진(諸鎭)으로 편입시켜 통제사 의 직접적인 관할을 받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섬진진을 설치하고자 한 것은 그같은 군 사적인 목적 때문에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제 적인 측면에서 유용성을 고려한 결과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였다. 섬진진은 해방(海防)이라는 그 본래의 임무에 더하여, 통제영의 재정적인 기반을 튼 튼히 하는 데에서도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통영으로부터 위임받은 환 곡을 관리하였고, 두치장을 개설하여 장세를 거둬들였으며, 나아가 섬진강 을 왕래하는 선박으로부터 선박세를 징수하는 등, 삼도수군통제영의 재정 운용상 빼놓아서는 안되는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통제영에서 굳이 전라도 광양 땅에 있던 섬진진을 직접 관할하고자 하였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이득을 취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섬진진의 별장에 대한 통제사의 포폄(褒貶)의 글 중 에는 환곡의 수납이나 장세의 징수와 관련되는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고 한다. 또한 통제사의 권한이라 할 섬진진 별장의 임명을 두고 전라감사 나 광양현감의 월권행위가 나타나는 등, 섬진진 운영도 주도권들 둘러싸고 때때로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경제적인 측면에서 섬진 진이 지니는 비중이 컸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자, 앞서 언급하였던 바 통제 영이 구태여 섬진진을 전관(專管)의 속진(屬鎭)으로 거느리고자 애를 썼 던 속셈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할 것이다.
(5) 섬진진지의 현황
섬진진에 세워진 건물의 규모는『광양읍지(光陽邑誌)』, 『희양지(曦陽 誌)』를 통해 알 수 있다. 『광양읍지』에는 아사와 서해관 등 공해 2동이 있 고, 진의 동쪽에 병량창 진창 통창(兵糧倉鎭倉統倉)이 있으며, 진의 북쪽 에는 군기고 육물고 화약고(軍器庫陸物庫火藥庫)가 있어 총 6동의 창고 가 기록되어 있다.
『희양지』에는“서해관(誓海館)이란 집무청 및 창고 6채와 아사(衙舍) 등 8채의 집이 있었고, 병선으로는 방선(防船) 2척, 사조선(伺條船) 2척이 있 었다. 또한 당시의 주둔군은 359명이었으며, 진 주변에는 민가 88호가 있 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과 함께 1872년에 제작된『전라도지도(군∙현∙진)』광양현 섬진진의 고지도에서도 건물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지도에는 아사 (衙舍)와 내아(內衙), 군기 장청 작청 진창 사령청 성황당(軍器∙將廳∙作 廳∙鎭倉∙使令廳∙城隍堂) 등 총 8동의 건물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섬진진에는 서해관, 옥터, 군량터, 진둔지 등의 이름과 선황당터, 당 산 등 옛 이름이 남아 있다. 이를 위의 사료의 내용과 종합하여 그 위치를 비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아사와 내아
주민들은‘별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희양지』에는‘서해관(誓海館)’이 라 명기되어 있는데,『 전라도지도』와비교할때 아사와 내아에 해당되는 곳 으로 판단된다. 이곳은 마을에서 비교적 높은 위치에 해당하며 이곳을 중심 으로 동서남북에 건물이 들어서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자리는 현재 도사리 121번지 박덕균씨의 집터로 변해 있다. 박씨는 그 의 할아버지가 이곳 수군으로 있다가 1895년 진이 없어지면서 통영 사람 들이 아사 건물을 뜯어갈 때 서까래 등을 모아 지금의 집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아사의 주춧돌로 사용되었던 4매의 석재가 현재 박덕균씨 댁의 주 춧돌로 사용되고 있다.
② 진창과 작청
주민들은‘군량터’라 부르고 있는데, 군사물품이나 식량을 두는 곳으로 박덕균씨 댁 즉 아사와 내아의 아래쪽인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③ 군기
주민들은‘무기창고’라 부르고 있는 곳이다. 박덕균씨 집의 남서쪽에 위 치하고 있어,『 전라도지도』의 군기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생각된다. 무기를 만들거나 보관하던 곳으로서 후에 밭으로 경작되었으나 현재는 박덕균씨 의 진입로로 포장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④ 장청
박덕균씨 댁의 서쪽에 위치하는 곳으로 마을에서는‘장정터’로 부르고 있다. 군이 주둔했던 터로 지금은 밤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면적은 20×15m 정도이다.
⑤ 성황당
박덕균씨 댁의 뒤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북쪽으로 낮은 동산이 형성되어 있는데 마을에서는‘선화당터’로 부르고 있는데, 나라에서 회의가 있으면 공을 들이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밤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주위에는 바 위들이 있다. 『전라도지도』에서는 아사와 내아의 북쪽 낮은 산을 성황당 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때 이곳이‘성황당’으로 판단된다. 현재 면적은 31×14.6cm이다.
⑥ 선돌바위
섬진 강가에 여러 바위들과 함게 당시 배를 묶었던 바위가 좌우에 깊게 홈이 파여진 상태로 남아 있다. 바위의 둘레는 570cm이다. 조선시대 말까 지도 1백 24명이 승선한 대병선이 정박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선돌바위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수량이 줄고 퇴적이 심해 겨우 2~3 톤급 나룻배도 장대질로 겨우 건너다닐 수 있게 변하였다.
2. 기타(비읍지 내천현성지 중군현성지)
(1) 비읍지(飛邑址)
진상면 비평리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왔으나 전혀 흔적이 없다. 따라서 비읍의 규모나 내용 등도 알 수 없다.
(2) 내천현성지(奈川縣城址)
옥룡면 내천마을에 있었다 하나 고증할 길이 없다. 삼한시대의 현성이 있 었다고 한다. 옥룡면이 옛 광양의 중심지였다는 끊임없는 구전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이곳이 백운산의 한재를 넘어 구례와 남원으로 연결되고 동으로 하동과 연결되기 쉬운 교통의 요충지이므로 군대가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중군현성지(中軍縣城址)
골약면 중군리에 있다. 삼한시대의 현성으로 전해져 오는데 주로 해안선 의 경비를 위해 설치되었던 듯 하다. 성터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고 하 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