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방유적단(壇)
분류 : 관방유적
간략설명 : 단(壇) 1) 사직단(社稷壇) 사직단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사직제는 지 신과 곡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옛날에 왕이 될 때에는 반드시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와 존망을 같이 하였는데, 곧 백성은 땅 이 없으면 설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옛날부터 왕이 나라 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모두
1. 사직단(社稷壇)
사직단은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지내는 제단이다. 사직제는 지 신과 곡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옛날에 왕이 될 때에는 반드시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어 국가와 존망을 같이 하였는데, 곧 백성은 땅 이 없으면 설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옛날부터 왕이 나라 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모두 사직단을 만들어 백성을 위하는 제 사를 지냈던 것이다. 따라서 사직은 흔히 국가나 조정을 일컫기도 한다. 조 선시대에는 사직제를 종묘의 제사와 같이 중요시하여 서울에서는 궁성안 서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여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각 군읍에 도 사직단을 구축하여 각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축문의 내 용에는 대개‘사직신의 덕택으로 우순풍조하여 오곡이 풍등하고 제반 재액 을 제어하여, 국태민안하도록 토지신명이 보살펴 달라’는 기원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도 각 고을에 사직단이 있었던 흔적이 많다. 그것은 지 명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가령, 사직골, 사직거리, 사직동 등의 지명이 그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국가의 모독과 문화의 말살 및 왜곡 차원에서 사직단 이 있는 곳을 공원화시키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의 사직공원 이다. 광양의 사직단은 봉강면 석사리 명암 마을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2. 여제단( 祭壇)

여제에 관한 기록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태종대(太宗代)에 나타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여제는 제사를 받아먹지 못한 귀신에게 제사 를 지내 줌으로써 여귀의 한을 풀어주고, 민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 기 위하여 행한 의례라 하였고, 여제의 단위로는 경중(京中)과 외방(外方) 의 각 행정 단위로 나누었으며, 현을 최하위 단위로 하였다. 여제는 봄에는 청명, 가을에는 7월 15일, 겨울에는 10월 1일에 치제되었고, 여제단은 각 성의 북쪽에 두었으며, 제물은 경중에서는 양 세 마리, 돼지 세 마리, 쌀 45 말을 쓰고, 외방에서는 경중에 비해 3분의 1을 감하고, 현에서는 다시 그 반으로 줄였다. 제물 중에서 양은 노루나 사슴으로 대신 사용할 수 있었다. 제5장 문화유산 조선시대에는 사직제를 종묘 의 제사와 같이 중요시하여 서 울에서는 궁성안 서쪽에 사직 단을 설치하여 임금이 직접 제 사를 지냈다. 13) 전라남도∙전남대 호남문 화연소. 『전남향토문화백과 사전』.2002. 태학사. 459 쪽. 광양군지편찬위원회. 『光陽郡誌』.1983. 891쪽. 300 제관(祭官)은 경중이나 개성은 당상관을 파견하였고, 각 외방은 그 수령이 치제케 했다. 후에 이러한 여제 가 민간신앙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도군 진도 읍 교동리에서는 일년에 두 번 여제를 지냈는데, 정월 에 사람들이 귀신을 몰아서 여제단에 가두고 제사를 지낸 뒤 문을 잠가 두었다가, 농사를 짓고 나서 시월 에 귀신을 풀어준다. 여제단은 귀신을 잡아 가두는 감 옥이라고도 한다. 여제단은 한마디로 한해의 액운과 질병을 막기위해 여신( 神)을 제사하 는 곳으로, 광양 경우 여러 곳에 있었다고 하며 그 대표적인 것이 우산리 내 우 마을과 인서리에 있었다.
3. 성황당(城隍堂)
고려 문종 9년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 이래로 고려시대부터 왕실에서는 명산대천이나 성황신에 작호를 수여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전라도에서는 지리산, 금성산, 무등산은 호국백(護國伯) 의 작호를 받았고, 이는 대부분 신의 호국적 기능에 대한 보답으로서 취해 졌다. 고려 중기 이래로 각 고을의 성황제는 무당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따 라서 당시의 성황신앙은 무속이나 산신신앙과 융합된 형태로 유지되어 왔 는데, 조선 태조대에 이르러서는 신흥사대부들의 사전(祀典) 개편과 음사 론을 이유로 국가에서 이를 직접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사전에 등 재된 성황제는 해당 지역의 수령이 왕을 대리하여 지낼 정도로 성황신은 단순한 신앙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국가 운명의 성쇠를 반영하는 상징물 로까지 인식되었다. 세종 때 성황은 풍운뢰우에 붙여 산천과 함께 국가의 공식적인 치제의 대상이 되었고, 또 그 의식에 따른 제반 사항의 절차가 정 비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각 도마다 성황사가 건립되면서 지방 사회에 점차 확산되었고, 그로 인해 각 도마다 성황사가 적게는 20여 개에서 많게는 60 여 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전라도에는 58개의 성황제가 법제와는 달 리, 춘추마다 정기적으로 치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황당은 광양의 경우 각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어졌으며, 대표적인 것은 광양읍 목성리 성황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