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방유적공해(公力) 성곽건물지
분류 : 관방유적
간략설명 : 공해(公力) 성곽건물지 1) 광양읍성지 광양읍성의 초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15년(태종 15)에 전라도 관 찰사 박습(朴習)의 계문(啓文)에“장흥∙고흥∙광양 3읍의 땅은 모두 바 닷가에 있어 왜구가 배를 대는 곳인데 전일에 설치한 성이 모두 좁고 나무 를 세어 진흙을 발랐으므로 세월이 오래되니 기울고 무너짐이 심하고 혹은 샘과 우물이 없습니다…”16
1. 광양읍성지
광양읍성의 초축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15년(태종 15)에 전라도 관 찰사 박습(朴習)의 계문(啓文)에“장흥∙고흥∙광양 3읍의 땅은 모두 바 닷가에 있어 왜구가 배를 대는 곳인데 전일에 설치한 성이 모두 좁고 나무 를 세어 진흙을 발랐으므로 세월이 오래되니 기울고 무너짐이 심하고 혹은 샘과 우물이 없습니다…”16)라는 기사로 보아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조 태종 13년(1413)에 광양현을 설치한 이전부터 성이 쌓아졌음을 알 수 있으나 당시는 목책성이었다. 이후 세종 12년(1430)에“전라 충청 경상 삼도의 각 고을의 성을 예전터에 그대로 수축할 곳과 새로 쌓을 성을 마련 하라”17)는 기사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에 석축성으로 쌓아졌을 것으로 추 정되지만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음을 그후 1451(문종 원년) 8월 하삼도체 찰사 정분(鄭芬)의 순찰결과보고에 광양읍성은 그대로 완성시킬「잉구(仍 舊)」의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음에도 알 수 있다. 이때 광양읍성의 규모는 둘레 1,812尺, 높이 7尺6寸, 여장고 3척, 적대 9개중 미축이 7, 문 3, 옹성 은 없으며, 여장 374尺, 해자 둘레 1995尺으로 적대 7개와 옹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곽시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광양읍성의 규모와 부속시설을 표로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표에서 보이듯이『신증동국여지승람』이후 약간씩 城의 규모가 다 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비교적 변화없이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 운데『호남읍지』에 보이는 高40尺은 잘못 표기한 듯하다. 성의 부속건물 은 성의 규모에 비해 심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치첩(雉堞)과 호지(壕池)가 기록에 나타나는 1700년대 중반경에 대대적인 성곽의 보수와 축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한편『희양지』의 기록으로 보아 1925년 이전까지는 성의 유적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 며, 대부분 1920년대 후반을 전후해서 훼철된 듯하다. 현재의 유적현황은 성벽과 성문은 모두 유실되고 그 흔적을 찾을 수 없 다. 성문의 위치는 합동정류소가 있는 사거리에 남문이 있었고 여기에 망호 루가 있었으나 1927년 화재로 소실 되었다. 동문은 현 우체국 부근, 서문은 경찰서 서편에 있었다. 북문은 풍수설에 의해 건립하지 않고 7개의 동산을 만들었다고 하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 광양 세풍리 해창 유적
광양시 광양읍 세풍리 해창마을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에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저장하던 창고터라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초석 일부만 노출되어 있을 뿐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3. 기타
① 등막등(燈幕嶝)

광양읍 인동리 지금의 광양역사에서 남쪽으로 200m 지점에 있었다. 고려시대 이후 이곳에 등막 등 이 설치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지금의 등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바다는 등막등이 있있던 곳까지 깊 숙이 침투하여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② 개머리보
칠성리 서산 밑으로 흐르는 서천에 구축된 보. 고려 말기부터 설치된 것이라 전한다. 여기에서 약2㎞ 떨 어진 688정보의 정자평의 농업용수로 이용되어 왔다. 백운저수지가 생긴 후 콘크리트화 되었다.
③ 조련장
서초등학교 남쪽 500m 지점에 있었던 군사훈련장. 지금은 모습을 찾을 길 없다. 그러나 그곳의 논(약 1,500평)을 지금도‘조련배미’라고 불러 당 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④ 암서와(岩棲窩)
봉강면 구서리 비봉산 중턱 해발 500m 지점에 있는 자연암굴이다. 높이 10m, 폭 15m 정도의 암괴가 절벽을 이룬 밑에 자연히 생긴 것이다. 암굴의 넓이는 약 10평이며 안에는 샘이 있다. 이곳은 1849년경 솔성재 박정일 (率性齋朴禎一)이 수학한 곳이다. 그는 당시 이 고장의 존경받는 선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그의 6대손 박기홍(朴己洪)이 암굴안에 자그마한 거 소를 마련하고 해마다 4월 15일에 제향하였다고 한다.
⑤ 용기(龍旗, 덕석기)
광양읍 우산리 교촌마을에 보존되어 있었던 권농기로 일명‘덕석기’라고 도 한다. 영조 40년(1764), 이 고을 현감 윤익(尹謚)의 지휘 감독으로 만들 어진 것으로 가로 3m, 세로 1.8m, 중국산 당목이다. 이 기의 흰 바탕에는 연한 하늘색 구름이 깔렸고 구름 위에는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황룡과 청룡이 5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 기는 농악대의 선두에서는 권농 기의 역할을 했고 농악대의 접전이 벌어지면 향도의 역할을 하는가 하면 승전을 알리는 기치가 되기도 하였다. 다른 지방에서는 농악대의 앞에「農 者天下之大本」이라 쓴 기를 세웠지만 이 고장에서는 권농기가 서고 그 뒤를 한쌍의 영기(令旗)가 따랐다.20)
⑥ 객사(客舍) : 희양관(曦陽館)으로 불리웠다.
공용여행자의 숙식을 위 한 접객소로 인조 1년(1623)에 현감 박문명(朴文明)이 건립. 1911년부터 광양공립보통학교로 사용되다가 후에 광양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1951 년 1월 14일 빨치산의 방화로 불에 타고 그 자리에 다시 읍사무소 건물이 세워졌다. 1981년 읍사무소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진 후 철거되었다.
⑦ 아사(衙舍) : 현 사무 종사자들의 거처. 1910년부터 광양경찰서로 사 용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는 그 터가 시민 주차장이 되고 있다.
⑧ 동헌(東軒) : 일명 봉양각(鳳陽閣)으로 불리웠다. 현감의 행정집무소. 1918년부터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광양등기소로 사용되었다. 1970년경 등기소의 신축으로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는데 현재는 상설시장 주차 장으로 변했다.
⑨ 작청(作廳) : 육방(六 房)이 집무하는 곳. 1913년에 훼철되고 그곳에 군청이 세워졌다. 현 읍사무소임.
⑩ 훈도청(訓導廳) : 현 읍사무소 우측 앞에 있었다. 지금의 교육구청의 구실을 하였던 곳으로 1910년 이곳에 우편소가 개설되었다가 후에 헐리고 지금의 광양읍 청사 부지로 편입 되었다.
⑪ 장방청(長房廳) : 육방의 합의장소. 현 시장관사 동편에 있었는데 1915년 광양 금융조합 청사로이용되었다. 지금은 옛 자리에 민가가 들어 섰다.
⑫ 라장청(羅將廳) : 군인 장교의 집무소. 현 시장관사
⑬ 형방청(刑房廳) : 행형(行刑)하던 곳.
⑭ 통인청(通引廳) : 현감의 비서실. 등기소의 서쪽에 붙어 있었다.
⑮ 향청(鄕廳) : 수령에 자문역할을 하는 지방 자치기구. 수령보좌, 풍속 교정, 향리의 규찰, 정령의 민간전달의 임무를 행하였다. 지금의 공보관과 제일약국을 잇는 골목의 남쪽편에 있었다. 1907년 9월 현재의 광양서초등 학교 전신인 사립 희양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하였으며 그 후 이곳은 한때 접객업소인 부용관으로도 사용되었다.
16. 현사(縣司) : 戶長의 집무소. 현 읍사무소의 서쪽에 붙어 있었다.
17. 관노청(官奴廳) : 관노들의 거처. 지금의 시장관사 동북편에 있었는데 1911년 훼철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