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유적과 유물향교
분류 : 유교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유교문화유적의 조사대상은 광양지역의 선조들이 남긴 많은 문화적 유 산 가운데 유교문화(儒敎文化)와 관련된 향교(鄕校), 서원(書院), 누정(樓 亭), 정려(旌閭), 비석(碑石) 등이다. 이러한 조사의 목적은 소멸되어 가는 유적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기존에 알려진 유적들에 대한 폭넓은 조사와 자 세한 분석 등을 통해 역사적인 가치와 의의를 구명하고 아울러 전승
유교문화유적의 조사대상은 광양지역의 선조들이 남긴 많은 문화적 유 산 가운데 유교문화(儒敎文化)와 관련된 향교(鄕校), 서원(書院), 누정(樓 亭), 정려(旌閭), 비석(碑石) 등이다. 이러한 조사의 목적은 소멸되어 가는 유적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기존에 알려진 유적들에 대한 폭넓은 조사와 자 세한 분석 등을 통해 역사적인 가치와 의의를 구명하고 아울러 전승 발전 시키는데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관례대로 광양의 유교유적과 유물을 ① 향교(鄕校), ② 서원(書院)∙사우(祠宇)∙서재(書齋), ③ 누 (樓)∙정(亭)∙당(堂)∙대(臺), ④ 정려(旌閭), ⑤ 비석(碑石) 등으로 구분 하여 서술한다. 그런데 유물∙유적의 선정기준은 1910년 이전에 창건된 것을 원칙으로 하겠다. 또한 1910년 이전에 창건되어 중간에 혁파되었다 가 1910년 이후에 재건된 유물∙유적도 서술에 포함된다.
향교
1. 광양향교(光陽鄕校)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교촌 509
광양향교는 15세기 전반 태조~태종대에 설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추측은 다 음의 기록을 통하여 가능하다. 1817년(순조 17)에 김영한(金永翰)이 지어『광양읍지』 (1925년 간행)에 수록된‘대성전중건상량 문(大成殿重建上樑文)’에 병(丙)년에 창설 하기 시작하여 정(丁)년에 완성하니, 인(仁) 과 의(義)를 문로(門路)로 삼아 일향의 선비 들이 여기에서 학업을 연마했다고 한다. 그 러므로 위 기사는 광양향교가 1396년(태조 5) 병자년에 건립되기 시작하 여 1397년(태조 6) 정축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광양은 상당히 이른 시기인 고려 명종(明宗)대인 12세기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어 순천 관할의 속현(屬縣)에서 벗어나 이미 독립 군 현으로서의 통치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15세기 초반 에 향교가 설치될 기반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광양 향교는 전라도 관내에서 상당히 일찍 건립되었다고 판단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16세기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광양향교는 현의 북쪽 5리에 있었다. 원래 향교가 들어선 곳이 바로 이 곳이었을 것이다. 향교는 제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고, 양반들이 활동하는 향촌기구이기 때문에 광양향교의 건물도 제사를 거행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공간으로, 그리고 양 반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 막바지에 접어든 1597년(선조 30)에 왜구에 의해 광양 읍내가 함락되 어 참혹한 전화를 입게 된다. 이 때 광양은 독립 고을로서의 면모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하여 혁파되고 순천에 합속되는 운명을 맞는다(곧이어 복설됨). 바로 이 때 향교 건물 전체가 소실되고, 관련 기록마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전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전란이끝나고10여년지난뒤에향교건물은재건된다.『 광양읍지』선생 안조에 따르면 1612년(광해군 4) 8월에 부임하여 이듬해 2월에 이임한 현 감 이오(李 )가 향교를 건립하고 아사(衙舍)를 지었다 한다. 그런데‘대 성전중건상량문’에 의하면 1613년(광해군 5)에 신임 현감이 부임해와 곧 동지(향중 유림) 1~2인과 협력하여 훌륭한 장인을 초대하고 좋은 나무를 운반해 와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을 건립하여 향교 재건에 나섰다 한다. 따라서 임란 중에 소실된 광양 향교는 1613년에 현감 이오(李們)가 향중사림의 협력을 받아 중건하였었음을 알 수 있다. 1798년에 편찬된『광양현읍지』에 향교가 현 북 5리에 있다고 기록된 것 으로 보아 17세기에 재건된 향교도 원래의 위치에 들어섰던 것 같다. 향교 위치가 수해나 풍수 또는 협소 등의 이유로 자주 옮겨진 고을이 있지만, 광 양 향교는 국초에 들어선 곳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명륜당(明倫堂: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동재(東齋: 양반출신 학생들의 기숙사), 서재(西齋: 평민 충신 학생들의 기숙사), 풍화루(風化樓: 출입 문) 등이 연차적으로 세워졌다. 이들 교사(校舍)의 건립 시기를 암시해주 는 자료로『광양읍지』선생안조를 들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658년(효종 9) 3월에 부임하여 1660년(현종 1) 12월에 이임한 현감 이송로(李松老) 가 전대동고(田大同庫)와 명륜당, 문루 및 동재∙서재를 건립했다 한다. 따 라서 1613년에는 우선 급한 대성전만 재건되고, 나머지 건물은 그로부터 40여년 지난 1658년경에 대부분 재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765년(영조 41)과 1817년(순조 17)에 풍화루와 대성전이 각각 중건된 바 있었다. 이후 광양향교는 1903년(광무 7) 현감 조예석(趙禮錫) 재임시에 명륜당, 동재, 상재 등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나, 1910년 국권 강탈과 동시에 향교전답이 모두 신교육기관으로 귀속되면서 운영난에 봉 착하였다. 그러나 향중이 자체적으로 사림계(士林契)를 조직하여 재정난 을 해결함으로써 전과 다름없이 향교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사림계는 광양의 양반들이 향약(鄕約)의 전통을 이어 받아 1917년에 창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자료가 향교에 소장되어 있어 참고가 될 것이다. 1966년 에는 군수 공화현(孔華鉉)과 전교 정용재(鄭容材) 등이 풍화루를 돌기둥 으로 대체하여 중건하였다. 이후 1977년 전교 주정록(朱珽錄) 등이 협력 하여 명륜당을 중건하였고 동∙서재의 보수와 대성전 및 풍화루의 단청공 사를 하였고, 1982년에는 대성전∙재실 등이 수리되어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2002년에 걸쳐 김옥현(金玉炫) 광양시장 재임시에 도비 및 시비지원을 받아 대성전∙상 재 및 제기고 담장을 개축하고 명륜당∙직사재(덕성재) 및 제기고 기단을 보수하였으며 환경정비사업으로 잔디식재, 조경과 향교마당 콘크리트해체 정비 등 대대적인 보수∙정비로 고유의 전통가옥으로 복원하였으며 2004년에는 국회의원 정철기(鄭哲基)와 광양시장 이성웅(李聖雄)의 도움으로 국비 및 시비보조를 받아 성균관 유도회 전남 광양시지부 건물을 향교 입 구에 건립하여 광양고을 유림들의 전당으로 활용되도록 하였다 현재 향교는 풍화루, 동∙서재, 명륜당, 상재, 직사재(덕성재), 대성전, 내 삼문, 제기고, 홍살문, 하마비 등으로 공간 구성이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 배치방법인 교당부와 문묘부의 전후관계에 의한 축배치가 아 니고, 대성전의 문묘부를 명륜당 좌측에 두는 좌우배치의 경사지 건축인데 다만 명륜당과 외삼문의 기능도 갖고 있는 풍화루는 동∙서재의 중앙을 지 나는 남동향의 축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 외 건물의 배치를 보면 동∙서재 외에도 명륜당 좌측에 상재가 있는 것은 타향교에서 볼 수 없는 특이점이 며, 풍화루 앞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으며, 명륜당 좌측에는 약 520년 수령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향교의 기능이나 인적구성 및 경제기반 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제5편 교육, 제1장 전통시대의 교육의 향교편을 참고하면 유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