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유교유적과 유물서원∙사우∙서재

분류 : 유교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서원∙사우∙서재 1) 신재서원(新齋書院: 鳳陽祠)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59-1신재서원(新齋書院: 鳳陽祠)은 우장면 현 북 3리 향교 옆에 1577년(선조 10)에서 1580년(선조 13) 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鄭淑男)이 1578년 기묘명현이면서 대학자였던 광양고을 출신 최산두 (崔山斗)와 역시 기묘명현이면서 중종 때 광양 현감 을 지

1. 신재서원(新齋書院: 鳳陽祠)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59-1
신재서원(新齋書院: 鳳陽祠)은 우장면 현 북 3리 향교 옆에 1577년(선조 10)에서 1580년(선조 13) 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鄭淑男)이 1578년 기묘명현이면서 대학자였던 광양고을 출신 최산두 (崔山斗)와 역시 기묘명현이면서 중종 때 광양 현감 을 지낸 박세후(朴世煦)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것 으로 추정된다. 최산두(1482~1536)는 조선 중종 때 기묘명현으 로 호는 신재, 본관은 광양으로 광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백운산 에 내린 북두칠성 성광의 영기를 받았다하여 이름을 산두(山斗)로 지었다 한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뛰어나 8세 때에 이미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인근 순천에 유배해왔던 한훤당 김굉필(金宏弼)로부터 학업을 닦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사간원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영예를 누리기도 하 였다. 1519년(중종 14) 의정부 사인으로 근무할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한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지목되어 동복(同福)에 유배되었다. 이후 1533년까지 15년간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여 대학 자로서의 명성을 남기었다. 그와 교류한 학자로는 호남 출신으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金麟厚)가 있다. 박세후(1493~1550)는 중종 때 기묘명현으로 호는 인재, 본관은 상주 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6년(중종 11) 진사과에 오른 후 1519년에 별시문과에 급제, 홍문과 박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1528년(중종 23)에 광양현감에 임명되었다. 광양현감으로 있을 때 특히 학문을 장려하여 사마소(司馬所: 생원과 진사들이 참여하는 향촌기 구)를 건립하는 등 크게 유업을 일으켜 훗날까지 읍인들의 칭송을 자자하 게 들었다. 도학자 풍의 청백리로서 관직은 관찰사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에 왜구의 침공으로 읍내가 함락되면서 신재서원도 소실되 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실 이후 단지 터만 남아 있었는데, 1690년(숙종 16)에 광양의 많은 선비들이 중건 의사를 주창한 후 감영에 소청을 올렸고, 이듬해에 원우를 중건하게 된다. 숙종 신미년(1691)에 사민(士民)이 건립 했다는『서원가고』의 기록은 중건을 말한 것이다. 중건 이후 사액을 받지는 못하였는데, 기묘명현이고 호남 3걸로 불릴 만큼 대학자인 최산두를 배향 하는 서원이 사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광양 사림들과 수령들의 의지가 부족한 결과였지 않을까 추측된다. 1775년(영조 51)에는 향중유림 정철진∙서윤화 등의 주도적인 노력에 의해 중수를 하게 된다. 그리고 1828년(순조 28)에는 정한기∙서현두 등 의 적극적인 협력에 의해 또 한차례 중수한다. 그런데 서윤화 등은 흥학재 를 중건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따라서 서윤화 등의 광양 유림들은 향 교-흥학재-서원을 함께 진흥시키는데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향교를 주 도적으로 이끈 세력과 서원을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이 서로 당색(黨色)을 달리하며 대립과 갈등을 빚었던 곳도 적지 않았다. 신재서원은 1868년(고 종 5)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해방 이후 1967년에 봉양사 복설기성회가 조직되고 1977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복설되었다. 관련 유물∙유적으로는 현재 서원 경내 사우 입구에 서 있는 2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그것은 1775년(영조 51)에 건립된「신재선생유허비」와 1828년(순조 28)에 건립한「봉양사사적비」이다. 이에 대해서는 비석편에서 후술할 것이다.

 

2. 옥평사(玉坪祠)

소재지 : 옥룡면 운평리 하평마을
옥평사는 1959년에 유림의 발의로 건립하였다. 배 향 인물은 이천 서씨 출신의 원숙공(元肅公) 서눌(徐 訥), 기은(箕隱) 서희찬(徐希贊), 문의공(文毅公) 서 호(徐浩), 서열(徐悅), 서일(徐鎰) 등이다. 그러므로 옥평사는 이천 서씨의 문중 사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배향 인물 가운데 서눌은 996년(성종 15) 문과에 장 원, 중승(中丞)과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그의 딸이 왕비가 되자 중추사우산기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 내사시랑(內史侍郞)를 거쳐 판서경유수사(判西京留守事)에 올랐고, 국왕으로부터 궤장을 받고 중대광 (重大匡)이 되었다. 뒤에 병이 위독해지자 임금의 문병을 받았고, 삼중대광 내사령(三重大匡內史令)에 임명됨과 동시에 자손에게 영업전(永業田)이 하사되었다. 서호는 서눌의 11세손으로 고려 충목왕 대에 과거에 올라 여 러 관직을 역임하다 전록생(田祿生)과 함께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의 토지 를 탈취하는 비리를 저지르는 친원세력 기삼만을 체포하여 심문하다 옥중 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비리를 파헤치려는 그의 정의감을 높이 평가하여 공민왕 대에 재등용된다.

 

3. 흥학재(興學齋)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교촌
광양 흥학재(興學齋)는 본래 향교 가까운 남쪽에 설치되어 이 지역 선비 들의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간에 여러 번의 병화를 거치면서 유실된 후 오랫동안 그 옛터와 이름만 남아 있 었다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양반출신인 서창우(徐昌祐)와 정수갑(鄭壽甲) 이 향교 간부인 교임(校任)으로서 재력을 모으고, 여기에 노론 출신의 권상 하(權尙夏) 문하에서 수학한 정수귀(鄭壽龜)가 합세하여 전답을 매입한 후 선비를 접대할 수 있는 양곡을 마련하였다. 아마 18세기 전반으로 추측된다. 1925년에 편찬된『광양군지』에는 김명갑(金命甲)과 강재래(姜載 來)도 함께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교임을 맡고 있는 광양지역의 유력 양반층들이 흥학재 중건에 매우 적극성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741년(영조 17)에 부임한 현감 임원(任遠)이 이듬해에 고을에 학사(學舍)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여 죽사(竹寺)라는 절을 재사(齋舍)로 삼 고 속공전답(屬公田畓: 죄인으로부터 몰수한 토지)을 지급하여 경제기반 으로 삼는 등 흥학재를 재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해에 이 임하게 된다. 그렇지만 단지 절목 1책이 남아 있어 전후 내력을 전할 수 있 었다 한다.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783년(정조 7)에 우정규(禹禎圭)가 신임 현 감으로 부임해 오면서 흥학재 재건 문제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된다. 우정규 는 광양 현감 역임 후 치국 개선책을 제시한『경제야언(經濟野言)』을 저술 하여 개혁적인 실학자로 이름을 남기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사풍(士風) 을 권장하고 문재(文才)를 부흥시키기 위해 흥학의 의지를 천명하게 된다. 그리고 부임한 이듬해 겨울에 읍내 선비들과 함께 재사 건립을 꾀하였고, 월등도(月登島)의 양외 가경전 16석락지를 흥학재에 속하게 하여 선비를 기르는데 소요되는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수귀의 손자인 정영 보(鄭榮甫)가 계속 공사를 감독하여 재사 건립을 완성하니, 흥학재 중건은 실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로양반인 서윤화(徐潤和)와 허정 보(許珽甫)가 여타 양반들과 합세하여 흥학재 건물 옆에 우정규 현감의 선 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정영보는 정수귀의 손자 이고 서윤화는 서창우의 아들이니, 조손간에 또는 부자간에 힘써 업을 계승 하였던 것으로 이 또한 그냥 넘길 수 없어 향중사림들이 옥룡면에 그 미담 을 비석에 적어 후세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한다. 이후 다시 보수가 행해졌는데, 「흥학재상량문(興學齋上樑文)」에 흥학재 의 보수사실과‘崇禎戊子三月利川人徐顯斗謹書’라고 기록되어 있다. 흥 학재 중수에 앞장 선 서현두(徐顯斗)는 1828년에 봉양사(鳳陽祠) 중수를 주도한 인물 바로 그분이다. 따라서 1828년에 다시 한번 흥학재가 중수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 오랜 세월이 지나 흥학재의 전답이 향교에 이속되 고 건물 역시 없어지게 되자 향교내의 상재(上齋)를 중수하여 재사(齋舍) 로 이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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