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유교유적과 유물누∙정∙당∙대

분류 : 유교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누∙정∙당∙대 1) 현존하는 누∙정∙당∙대 (1) 거연정(居然亭) 소재지 : 광양시 봉강면 봉당리 상봉봉강면 비봉산 동쪽 봉당리 상봉마을 봉강천변 위 치한 거연정은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구조로, 1898년에 박희권(朴熙權)의 독서처로 건립되었다. 박희권의 자는 영유(永裕)이 고, 호는 술재(述齋),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 현존하는 누∙정∙당∙대
(1) 거연정(居然亭)

소재지 : 광양시 봉강면 봉당리 상봉
봉강면 비봉산 동쪽 봉당리 상봉마을 봉강천변 위 치한 거연정은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구조로, 1898년에 박희권(朴熙權)의 독서처로 건립되었다. 박희권의 자는 영유(永裕)이 고, 호는 술재(述齋),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건립 이후 오랫동안 황폐되어 오다 1938년 후손 종린(鍾 麟)∙종룡(鍾龍)에 의해 새롭게 중건되었다. 매천(梅 泉) 황현(黃玹)이 지은 기문이 있으며, 정자 오른쪽 암벽에‘居然亭’이란 제명이 음각되어 있다.


(2) 유림정(柳林亭)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구산리 135-1 우산공원 내
광양읍 목성리 신성마을에 있었던 유림정 은 단층 팔작지붕 목조가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형 건물로 우측 후방의 1칸 에만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았다. 사대(射臺)의 정자였다. 사장(射場)은 원래 1528년 박세후(朴世 煦)현감이 현재 읍사무소 북쪽에 향사당(鄕 射堂)을 건립하여 궁술을 연마한 것이 시초 이며 그 이후 1905년에 광양읍 단위농협 창 고자리에 남사장(南射場), 1907년경에 광 양읍 칠성리 호북마을(칠성리 178-1로 추정)에 북사장(北射場)이 건립되 었으며 1917년 그곳 사장이 통합되어 유당공원 북쪽으로 옮기면서 유림정 (柳林亭)이라 칭하였다. 1943년 당시 이문화(李文華)사두가 부지를 기증하여 유당공원 남쪽으 로 옮기었으며, 1997년 12월 20일에 유림정을 유당공원에서 광양읍 구산리 135-1번지의 우산공원내로 옮기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풍화루(風化樓)

소재지 :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509
풍화루는 향교의 명륜당 앞에 위치한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 각 건물로서 1층은 원형 석주를 세우고 중앙에 쌍여닫이의 판장문을 달아 향교 의 출입문으로 이용하였으며, 2층에는 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서 팔작지 붕을 받게 하였다. 마루 주위에는 정교하 지 않은 계자(鷄子) 난간만으로 둘렀다. 풍화루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5년 우산리 보운마을에 위치한 보운사(普雲寺)가 없어지면서 그 정문을 옮긴 것이라 한 것으로 보 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향교가 소실된 후 1613년(광해군 5) 현 감(縣監) 이오(李們)가 향교를 중수할 때 세워진 듯하다. 『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기록된「풍화루중건상량문」를 보면, 풍화루 가 1825년(순조 25년)에 현감(縣監) 윤밀(尹謐)에 의해 중건되었다 한다. 그런데 윤밀의 재임기간은 1764년 7월부터 1766년 10월까지이고, 1825 년 당시의 현감은 김이승(金履昇: 1823년 12월 ~ 1826년 4월 재임)이 다. 따라서 1613년에 중건된 풍화루는 1825년 현감 김이승이 재임할 때 한 차례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풍화루에 걸려 있는「명륜당풍화루중 수기」(고종 26년, 縣監李有善) 등을 살펴보면 1889년(고종 26)에 풍화 루가 두 번째 중수되었다.


(4) 학사대(學士臺)

소재지 :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동동
옥룡면 동곡리 동동마을 앞 옥룡천 산경사면에 위치한 학사대는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동복(同福)에 유배되었던 신재(新齋) 최 산두(崔山斗)가 어린 시절 10년 동안 수학하였던 자연암굴이다. 이 암굴 내부는 사람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자연수가 흘러나온다. 또한 이 암굴 상단 5m 지점의 암 면에는‘학사대(學士臺)’라는 자필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 학사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최산두가 10년을 계획하고 이 곳에서 수 학하였는데 자신감이 생기고 지루하기도 하여 9년만 에 굴을 나와 밖의 풍경을 보고 문득 외우기를“泰山 壓後天無北”이라 한 다음 이음말을 찾지 못하고 있 는데, 한 초동이 나타나 그의 시를 받아“大海當前地失南”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최산두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우치고 1년을 더 공부하고 나와서 성공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 암굴 바위 위에 5인이 앉을 만한 정각를 세우고 학사대(學士臺)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있다.


(5) 감호정(鑑湖亭)

『광양군지』(1925년 간행) 누정조에 따르 면, 감호정은 현 동쪽 70리에 김지섭(金之攝 : 본관이 김해이고 고종 때에 都事를 역임했 다)이 창건하였으며, 백운산(白雲山) 아래 섬진강(蟾津江) 위에 있어 산수가 아름답고 화목이 기이하다고 하였다. 매천 황현이 지 은「감호정중건기」에 의하면, 1839년(헌종 5)에 김응난(金應瀾)의 조부가 마을의 누추 함을 걱정하여 감호정을 창건했다 한다. 그 러니까 김응난의 조부가 김지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천리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해 김씨 (65호)와 동래 정씨(35호)에 의해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자가 낮고 좁아 1860년(철종 11)에 건물을 높고 크게 중건하 게 된다. 이 때 인근 마을에서 재목과 장인 비용과 주찬 등을 거출한 것 같 다. 그러한 감호정을 김응난이 서숙(書塾)으로 삼고 있었던 것을 1900년 (고종 30)에 중건하니, 매천 황현이 중건기를 기록한 것이다. 제14연대 반 란사건과 6∙25동란기간 이곳 마을과 함께 정자가 쇠락하였으나 10여 년 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 복원하여 옛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6) 수성당(壽星堂)

소재지 광양읍 칠성리 12-1번지(호북마을)
수성당의 처음 위치는 옛 북사장터인 광양읍 칠성 리 178-1번지이며 이곳에서 처음 건립년도는 당시 군수였던 김동준(金東準)이 쓴 수성당기(壽星堂記) 와 수성당 창립 60주년 기념비에 의하면 당시 북사 장(北射場)터에 죽사 박정진(朴正鎭)의 발기로 1918년 건립(1918년 음력 3월 15일, 수성당 노인회 가 건립됨)되었고, 그후 10년후인 1928년에 지방인 사의 뜻을 모아 현재의 위치로 신축이전 하였다.


(7) 운고정(雲皐亭)

『누정총람(樓亭總覽)』에 의하면, 진상면 백운산 부소(釜沼) 위에 위치한 황하석(黃夏錫: 1799~ 1846)의 휴식소였다고 한다. 황하석은 일찍이 과거 를 포기하고 풍치가 좋은 이곳에서 생애를 보냈던 것 같다. 『광양군지』(1983년 간행)에 의하면 황하석의 5대손 호일(鎬一)이 운고공을 사모하여 1946년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최병심(崔秉心)과 김문옥(金文 鈺)의 기문이 있다고 하나, 『누정총람』에는 김문옥 의 기문만이 전하는데 1978년 수어댐 건설부지로 이 지역이 편입되자 진 상면 황죽리 죽림마을(황죽리 71번지)로 이축하였다.


(8) 청계당(聽溪堂)

『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의하면, 청계당(聽溪 堂)은 현 동쪽 50리에 있고, 1807년(순조 7)에 생원 (生員) 시험에 장원 급제한 황면기(黃勉基)의 정자 로서 그의 호가 되기도 하였다. 그의 집 앞에 청계(淸 溪)라는 개울이 있었는데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다. 황면기가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선생에 게서 공부하였는데, 성담 선생이 정자가 위치한 자연 을 고려하여 청계(聽溪)라는 당명(堂名)을 지어 주었다. 연재(淵齋) 송병선이 당기(堂記)를 지었고,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이 행장을 찬술했다 한 다. 본래는 진상면 비촌마을 남쪽에 위치하였으나 수어댐 건설로 인하여 1977년 진상면 황죽리 신황마을로 이축(移築)하였다

 

2. 현존하지 않은 누∙정∙당∙대

(1) 감사정(感思亭)
감사정은 김정태(金丁泰)가 그의 선조의 충효 행적을 기리는 뜻으로 세 운 것이라 하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종한(金宗漢: 1844~1932)이 쓴「감사정기(感思亭記)」에 광양군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광양현이 광양군으로 명칭이 변경된 1895년 이후로 짐작된다.


(2) 권가루(勸稼樓)
권가루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년 간행)에서는 현의 남쪽 3리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권가(勸稼)라는 이름 으로 보아 권농(勸農)이라는 수령의 통치행정과 관련되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호남읍지』(19세기 간행)와『광양군지』(1925년 간행)에는 현의 남쪽 5리에 있었다 한다. 이로 보아 권가루는 조선초기에 농업을 권장하기 위해 수령에 의해 현아(縣衙)의 남쪽 3리에 건립되었다가 나중에 5리 지점 으로 옮겨진 것 같다.


(3) 망조정(望釣亭)
조선호남지에 광양고을의 동쪽 국사봉 아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전하 는데 그 위치는 옥곡면 대죽리 백양마을 대죽천변에 있었는데 최근년에 사 라졌다. 조선호남지에 윤영구(尹寧求)의 기문이 남아있는데 이동우(李東 宇)라는 사람이 그의 아버지인 양천공(楊川公)이 낚시를 하였다는 사실을 기리는 양천조대라는 글이 망조정에 새겨져 있었다.


(4) 반구정(伴鷗亭)
반구정(伴鷗亭)은『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의하면, 현의 동쪽 50리 망덕산(望德山: 진월면 망덕리) 정상에 부호군(副護軍) 이채한(李採漢)이 강정(江亭)으로 모옥(茅屋)을 지었는데, 강호와 도서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아름다웠고 암석과 화림의 풍치 또한 기묘했다 한다. 반구정이란 이채한의호인데, 그의 본관은 전주이다. 이채한은 영조(英祖) 때에 일어난‘정희량 (鄭希亮)의 난’(1728년)이 순천에까지 미치자 사위인 상호군 송흠명(宋 欽明), 향중사림 서명팔(徐明八)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난을 평정시키는 데에 공을 세워 부호군을 제수받았다. 송환기(宋煥箕: 1728~1807)가 1789년에 지은「伴鷗亭記」가『광양읍 지』에 수록되어 있다. 송환기의 호는 심재 또는 성담이고, 본관은 은진으로 송시열의 5대손이다.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 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한다.


(5) 봉명루(鳳鳴樓)
『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따르면, 봉명루는 관사문 앞에 있었는데, 1918년에 헐렸다 한다. 『광양현각방도중기』(1869년 간행)에는 봉명루의 규모가6칸이었다고기록되어있다.『 광양읍지』(1925년간행)에서는성문 을 열고 닫는 곳이라 하였으나, 관사(官舍), 즉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東 軒)을 출입하는 문루였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6) 서산정(西山亭)
『광양군지』(1983년)에는 봉강면 봉당리 서산촌 뒤 검덕원에 있었고, 이 돈모(李敦模)가 세워 후학의 학업을 도왔다고 한다. 후에 원래의 위치보다 위쪽의 구릉으로 옮겼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이돈모는 본관은 전주, 자는 처윤, 호는 근재이며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고 한다.


(7) 서소정(西笑亭)
『호남읍지』(19세기)와『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서소정은 현의 서쪽 냇가 위에 있었는데, 이미 헐리고 없다. 그런데『광양군지』(1983년 간행) 에서는 봉강면 석사리 죽산(일명 비석바구) 밑에 있었고, 귀빈을 영송할 때 에 사용하던 곳이라 하였다. “광양의 원님은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옛말 이 있는데 그 슬픔을 나눈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기도 하였다. 서소정의 옛 터에 1718년(숙종 44) 현감 강성적(姜聖適)의 영세불망비가 남아 있는데 이 비는 현재 도괴되어 방치상태인데 현재 광양 고등학교에서 옥현마을로 가는 모퉁이에 위치한다.


(8) 수월정(水月亭)

수월정은 다압면 도사리 섬진강변 산수가 수려한 곳에 있 었던 것으로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접(鄭渫)이 만년 을 소일할 뜻으로 세웠던 정자로 송강(松江) 정철(鄭徹)이 「수월정기」를 썼다.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다압면 도사리 섬 진에「수월정 유허비」가 건립되어 있다.


(9) 암연정(岩淵亭)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암연정이 읍내 동쪽 5리에 있었다 한다. 『광양군지』(1925년 간행)에서는 읍내 동쪽 개울가에 있는데, 처사 서천일(徐千鎰)이 건립했고 그의 증손자가 바위에 암연정이라 는 이름을 새겼는데 그 위치는 광양읍 계곡마을 동천변에 있었다. 서 천일은 중종 때에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 나 나아가지 않고 이곳에 암연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장에 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는 상현 록과 문인록 두책이 전한다. 이후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암연정을 증손 신구(藎龜)가 중건하였다. 이 때 김중남이 쓴「암연정기(巖淵 亭記)」를 살펴보면, 1930년에 후손 한주(漢周)가 옛 암연정 옛터에 「암연정 유허비」를 건립하였으나 1972년 남해고속도로 공사로 인하 여 유허비를 옥룡면 하평마을 옥평사입구로 이건하였다.


(10) 운주루(運籌樓)
운주루는『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간행)에는 객사(客舍) 동쪽에 있 었다 한다. 이에 따르면 읍성이 축조되고, 그 이후 관아 체제가 구비될 때에 운주루는 건립되었던 것 같다. 이 위치를『광양군지』(1983년 간행)에서는 구 읍사무소 동쪽인 현재의 상설시장터라고 한다. 운주루의 기능에 대해서 는 전혀 기록이 없지만 수령이 읍정(邑政)을 선포하고 출장관리를 응접하 는 곳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누정은 거의 모든 고을마다 있었다(남원의 광한루, 태인의 피향정 등). 이렇게 볼 때 운주루는 읍성의 건립과 관련되어 들어섰을 것이다. 『광양군지』(1925년 간행)에 지금은 유허(遺墟)만 있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운주루는 일제 시대에 접어들어 이미 사라지고 터만 남 아있는 것이다.


(11) 월파대(月波臺)

광양읍 우산리 월파 마을에 위치하였던 월 파대(月波臺)는 서신구(徐藎龜 : 1633~?) 가 낚시하였던 곳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월파 대라 칭했다고 한다. 1970년 4월에 세워진「월파공유적비」의 비문에 의하면, 서신구의 자는 성서, 호는 월 파, 본관은 이천이다. 월숙공 눌(訥)의 후손 이며, 암연처사 천일(千鎰)의 증손이다. 또한 그는 암연정(巖淵亭)과 향교(鄕校)의 중건에도 관여하였다.


(12) 주변루(籌邊樓)
주변루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성(城)의 남쪽 문루(門樓)로서 망해루(望海樓)라고 하던 것을 1418년 (태종 1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주변루는 읍성의 남문 문루로서 읍성이 축조 될 때에 창건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광양군지』(1983년 간행)에서는“1528년에 현감 박세후가 창건 한 것으로 광양읍 칠성리 호북정(虎北亭)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광 양읍지』(1925년 간행) 선생안조에 현감 박세후가 1528년에 도임하여 주 변루를 건립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한 언급일 것이지만, 여기에서의 건립은 중건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주변루는 읍성 축성 당시 건립 되었다가, 1528년에 중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일제시대에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한다.


(13) 청조루(聽潮樓)
청조루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광양읍지』(1925년 간행)에 따르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에 농민군 진압에 나선 좌수영 군 인들에 의해 전소되었고, 1901년 군수(郡守) 이중익(李重翼)에 의해 중건 되었는데, 1923년 민가의 실화로 인해 또다시 소실되었다 한다. 『광양읍 지』에 수록된 이중익 작성「청조루중건상량문」에 따르면 이중익은 청조루 를 중건하면서 향리들과 협의하여 전에 쓰던 재목과 기와를 취하거나 12면 민들로부터 일정액을 거두어 중건비를 충당하였다. 청조루의 기능과 관련하여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으나, 소실과 중건을 언급하면서 동문(東 門)과 서문(西門)이 지금은 파괴되고 없다고 한 점이 참고된다. 다시 말하 면 청조루가 동문이나 서문의 문루(門樓)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여지도서』(18세기 중반)에는 성루(城樓)가 동문, 서문, 남문 3개 있었다 한다. 그렇다면 남문은 누각이 주변루(籌邊樓)이고, 동문이나 서문 가운데 하나의 누각이 청조루(聽潮樓)였던 것이다.


(14) 추모정(追慕亭)
『광양군지』(1983년)에 의하면 진월면 용소동에 있는 정자로 박종대(朴 鐘大)가계미년에건립했다고하나현존하지않고,『 조선호남지』에김종한 (金宗漢)이 지은 기문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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