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
1) 신재 최선생 유허비

광양읍 우산리 교촌마을 봉양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이다. 조선 중 종 때 기묘명현인 신재 최산두의 행적을 기록하여 놓은 이 비는 1775(영조51)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74. 6~1775. 12 재임)이 지었고, 김묵행이 글을 쓰고, 김연행이 새 겼다. 비의 형태는 가첨석이 없으며, 비신과 대좌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 는 전체 높이 243cm, 비 높이 203cm, 너비 80cm, 두께 22cm이다. 대 좌는 높이 40cm, 가로 145cm, 세로 80cm이며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2) 봉양사사적비

우산리 교촌마을 봉양사 입구에‘신재최선생유허비’와 나란히 세 워져 있는데‘봉양사사적비(鳳陽祠事蹟碑)’비문에 의하면 1828년 에 무너진 사우를 보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형태는 장방형 자연석 좌대 위에 비신을 세웠고, 가첨석은 우진각 지 붕형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1828년에 은진 송치규(宋穉圭)가 지었 으며, 비는 28년 후인 1856(철종7)에 세운 것으로 송달수가 글을 썼다. 비의 규모는 전체 높이 212cm, 비 높이 152cm, 너비 57cm, 두께 16cm이며, 비 대좌 높이 18cm, 가로 94cm, 세로 64cm이다.
3) 광양향교 입구 비군(7기)

광양읍 우산리 교촌마을 향교 입구에 근래에 세운 공적비 2기와 불망비 4기, 흥학비(興學碑) 1기 등 총 7기의 비가 있다. 이들 비 가 운데 불망비 4기는 1900년대 초에 세운 것들이며, 흥학비 1기는 건립연대 를 확인 할 수 없다. 비의 형태는 모두 양호하며, 이 가운데‘현감우후정규 흥학비’에만 귀면이 음각된 반원형 이수가 얹어져 있고, 나머지는 모두 팔 작형 가첨석이 비신 위에 얹어져 있다. 비가 건립된 순으로 열거하면 다음 과 같다.
- 현감우후정규흥학비(縣監禹侯禎圭興學碑) : 높이 144cm, 너비 45.5cm, 두께 13cm, 현감 재임기간 1783. 7~1785. 6
- 행군수서후병수중수불망비(行郡守徐侯丙壽 重修不忘碑) : 높이 144cm, 너비 45.5cm, 두 께 13cm, 군수 재임기간 1898. 3~1899. 2
- 행군수조후예석중수불망비(行郡守趙侯禮錫重修不忘碑) : 높이 139cm, 너비 44.5cm, 두 께 18.5cm, 1902년 비 세움.
- 행군수김후동준중수불망비(行郡守金侯東準重修不忘碑) : 높이 130cm, 너비 41cm, 두께 17.5m, 1917년 비 세움.
- 행군수김후영제중수불망비(行郡守金侯榮濟重修不忘碑) : 높이 144cm, 너비 45.5cm, 두께 13cm, 1927년 비 세움.
- 주전교정록교궁중수공적비(朱典敎珽錄敎宮重修功績碑) : 높이 76cm, 너비 44cm, 두께 20cm, 1976년 비 세움.
- 행시장김공옥현공적비(行市長金公沃炫功績碑) : 높이 147㎝, 너비 55 ㎝, 두께 25㎝. 2002년 비 세움
4) 유당공원의 비군(15기)

광양읍 인동리 유당공원 안에 총 15기의 비가 있다. 이 가운데 근래에 세운 공적비 2기와 정려 이건비 1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비가 고종 연 간에 세워졌다. 몇 기는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나『광양읍지(光陽邑誌)』 선생안에 그들의 재임기간이 기록되어 있어 비 의 건립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비의 현황 은 마모가 심한 4기 정도를 제외하고 모두 양호 한 편이다. 이 가운데 8기는 옥개석이 유실되고 없다. 15기의 비를 연대순으로 기록하되 관찰사, 현감, 군수, 기타 순으로 나열 하면 다음과 같다.
5) 토평사적비

유당공원 안 비군에 위치하고 있는 이 비는 1889년(고종 26)에 일어난 광양민란의 진압에 큰 공을 세운 당시의 광양현감 윤영신(尹榮信)을 기리 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은 조선 6대 성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장성의 유학자 노사 기정진(奇正鎭)이 썼다. 당시의 광양민란군은 전라감사 서상 정(徐相鼎)의 치계(馳啓)에 의하면“1889년 3월 24일 밤에 백건을 쓴 군 병 수백 명이 기치를 들고 방포하면서 성내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군기(軍 器)와 사창곡(社倉穀)을 탈취하고 현감 윤영신을 착치(捉致)하여 항서 (降書)를 바치도록 위협하면서 인부(印符)를 탈취하려 하였으며, 사민(使 民)에게 강제로 군복을 입혀 도당(徒黨)으로 삼고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반 거수성(盤據守城)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보(馳報)를 접하자 조정에서는 우선 현감 윤영신을 파출(罷黜)하고 영광군수 남정룡(南廷龍)을 안핵사로 차하(差下)하여 산등성이를 타고 밤에만 군사를 광양으로 향하게 하는 동 시에 전라병영과 5진영으로 하여금 정변(精兵)과 교졸(校卒)을 내어 토벌 토록 하였다. 그러나 난민으로부터 탈출한 윤영신이 칠성면 신기촌에서 정 세를 살피다가 동년 3월 25일 밤에 사민(使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 여 난도들을 체포하고 성을 수복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이 때에 윤영신과 함께 계책을 정한 사람은 정세준(鄭世俊), 장제연(張濟連), 윤병오(尹秉 澳)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민란의 주도자는 민회행(閔晦行), 전찬문, 이 재문, 권학년, 강명좌, 김문도 등이었다. 비는 전체 높이 226cm, 옥개석 가로 99cm, 세로 68cm, 높이 47cm, 비 의 높이 157cm, 너비 61.5cm, 두께 19.5cm이다. 비의 전면에 비문이 조각 되어 있으며 후면에 민란평정에 관련된 이름이 적혀 있다. 좌대는 장방형으 로 길이 91cm, 너비 61cm, 높이 22cm이다.
6) 수월정유허비

수월정유허비는 다압면 도사리 섬진강변에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냈던 정접(鄭渫)이 부친인 정옥천(鄭玉 川)의 유업을 추모하기 위해 송강 정철(鄭澈)로부터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라는 비명을 받아 1573 년에 비를 세웠던 것으로 일명「정옥천유허비(鄭玉川 遺墟碑)」라고도 한다. 그 당시의 비는 유실되고 1971 년 정접의 후손들인 광양과 부산 종중에서 다시 세운 것이다. 정접의 호는 수월정,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인관(仁寬)의 아들이다. 1576년(선 조 9)에 등과하여 나주목사(1598. 1~ 1598. 5 재임)를 지냈다. 현 재의 비는 1971년에 세운 것으로 비명은「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 碑)」이며 비문은 송강 정철이 짓고 박세래(朴世來)가 글을 썼다. 이 비의 전체 높이는 184cm, 비신 높이 128cm, 너비 43cm, 두께 18cm이다. 우진각 지붕의 가첨석과 2단의 장방형 대좌 사이에 비신 이 있다.
7) 열부 파평윤씨 기행비

이 비는 골약동 금곡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효열부파평윤씨기행비(孝烈婦坡平尹氏紀行碑)’라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임 인십이월상완서흥김규□체(壬寅十二月上浣瑞興金奎□迏)’라고 기록 되어 있다. 전체 크기는 2m이고 비신은 130×46×21cm이며 자경은 14cm이고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8) 이정규 영세불망비

이 비는 광양읍 용강리 석교마을 삼거리주유소 뒷산인 쌍고산의 남쪽 급경사면의 암반 위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수군절도사이공정규영세 불망비(水軍節度使李公廷珪永世不忘碑)’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측면 에‘술자 이월 일 오봉표 유사 황윤규(戌子二月日吳奉表有士黃潤 奎)’라고 새겨져 있다. 비신의 높이 122cm, 너비 45cm, 두께 13cm이 며, 비 상면은 높이 25cm, 두께 47cm, 너비 70cm이고 조선시대에 세 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9) 섬진진지 석비

다압면 도사리 수월정유허비 의 주위에 귀부좌대 4기가 놓여 있다. 4기의 좌대는 이곳이 과거 섬진진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수군 장교였던 별장들의 공적비 좌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거 북이 좌대 형태는 투박한 조형으 로 치아가 빠진 입을 드러낸 모습과 간략하게 네 발을 표현해 놓고 있다. 좌 대의 등에는 비신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가로 44cm, 세로 15cm, 깊이 10cm의 홈이 파여져 있다. 이 좌대의 크기는 길이 173cm, 폭 105cm, 높이 72cm이다.
10) 박성근자선비

옥곡면 신금리 3구(신촌마을) 옥곡초등학교내에 세워져 있다. 비의 규모 는 전체 높이가 230cm이고 비신 높이161cm, 비 너비 52cm, 두께 22.5cm 이다. 비의 정면에는‘가선대부호조참판박공성근자선비(嘉善大夫戶曹參 判朴公成根慈善碑)’라고 새겨져 있어 박성근의 자선비임을 알 수 있다.
11) 옥곡면 장동리 쌍효려비

옥곡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가다 장동교를 건너면 곡동마을이 나오는 데 비는 마을입구 회관 옆의 비각 안에 있다. 고종 29년(1892년)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면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받은 전주유씨 유계양(柳 季養)과 숙부인(淑夫人)의 증직을 받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효행을 기 리는 정려비이다. 쌍효려비의 향우측에‘개국오백삼십년기사사월십육일 (開國五百三十年己巳四月十六日)’이라는 비문이 있어 1929년에 건립되 었으며 비의 내용으로 보아 효열비임을 알 수 있다.
12) 송천사지 회은장로비

이 비는 옥룡면 동곡리 산 796-1번지 송천사지의 나한전지라 전해지 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있으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 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 비좌가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의 비좌를 만들어 지금은 각 부재가 모두 있다. 비의 전체 높이는 274cm, 비신 높이 183cm, 너비 76cm, 두께 18.8cm이다. 비신은 세장한 장방형으로 곳곳 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다. 비신의 윗면에는‘회은장로비명(悔隱長老碑銘)’이란 제명이 전서되어 있고 비문은 해서체이다. 이수는 장방형 으로 윗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 습이 조각되어 있다. 뒷면에는 용의 꼬리부분과 함께 게, 거북이, 달팽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를 구름무늬로 채우고 있다. 비문은 회은의 문도 인 처상, 광학, 옥청 등의 요청에 의해 조선조 후기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 곡 처능(白谷處能)이 지었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후의 행장과 승 장으로서의 활약,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우게 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기에 비 건립에 참여한 명단이 기록되 어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말미에‘황명숭정병자후사십이년정사월일(皇 明崇禎丙子後四十二年丁巳月日)’이라 적혀 있어 1677년(숙종 3 )임을 알 수 있다. 비명을 승려의 법명이 아닌 회은이란 호를 썼던 것은 회은이 승려 로서 평가되기보다는 오히려 승병대장으로 더 유명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 각된다.
13) 효자 서형흠비

옥룡면 용곡리 흥룡 마을에 있는 이 비석은 양 기둥 사이에 비신을 끼워넣은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비의 상부에 팔작형 가첨석을 얹어 놓았다. 비의 전면에‘효자통사랑행동몽 교관승정삼품통정대부이천서형흠지려(孝子通仕郞行童 蒙敎官陞正三品通政大夫利川徐馨欽之閭)’라 음각되어 있다. 비는 1905년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140cm, 비신 높이 34cm, 너비 50cm, 두께 10cm이다.
14) 처사서공 암연정유허비

옥룡면 운평리 하평 마을 옥평사(玉坪祠) 입구에 처사 서천일(徐千 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원래는 암연정(岩淵亭)이 광양읍 동천변에 있었으나 1972년 고속도로 공사로 인하여 현재의 자리로 이건해 놓은 것이다. 처사 서천일(1483~?)의 자는 중기(仲器), 본관 은 이천(利川)이다. 중종 때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군자감 주부(軍資 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광양읍 동천변에 암연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유실되고 현재는 상현록과 문인록(尙賢錄, 門人錄) 두 책이 전 한다. 비의 형태는 3단의 지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옥개석은 팔작 지붕이다. 비명은「처사서공암연정유허비(處士徐公岩淵亭遺墟碑)」 이며, 비문은 서천일의 12대손 서한주(徐漢周)가 찬하고, 서한종(徐漢種) 이 글을 썼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215cm, 너비 45cm, 두께 20cm이다.
15) 진상 금이리 이천 비군(5기)

진상면 금이리 이천마을 도로변에 치수사적비 등의 2기와 불망비 2기, 자혜비 1기 등 총 5기의 비가 있다. 이 가운데 치수사적비(治水事蹟碑) 등의 2기는 최근에 세운 것이다. ‘행현감이후유식휼민영세불망비(行縣監李後儒植恤民永世不忘碑)’는 높이 120cm, 너비 46cm, 두께 17cm이며 1876년에 세운 비이고, 후면에 비를 세운 연유와 비문의 찬자 서정신과 서자 안용묵 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행군수서후상붕혁폐불망 비(行郡守徐候相鵬革弊不忘碑)’는 높이 126cm, 너비47cm, 두께 22cm이며 1907년에 세웠다. 그리고‘가선대부우공유인자선 비(嘉善大夫禹公有仁慈善碑)’는 높이 107cm, 너비 35cm, 두께 17cm이 며 1868년(?)에 우유인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소작인 9명이 공동으로 세운 비이다.
16) 차성진 자선비

진상면 섬거리 용계마을에서 면소재지 방향으로 약 60m 정도 떨어진 도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구릉이 끝 나고 논이 시작되는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전면에‘전 참봉차공휘성진자선비(前參奉車公諱性鎭慈善碑)’, 좌측 면에‘진상옥곡면소작인입(津上玉谷面小作人立)’, 우측면 에‘신미사월일(辛未四月日)’이라고 새겨져 있어 1871년 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28cm, 너비 41cm, 두께 18cm이다.
17) 효자 양복수 정려비

진상면 청암리 목과마을에 위치한 이 효자비는 양복수(梁福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1년(고종 8년)에 건립한 것이다. 진상면 청암리에서 양종 기(梁鐘琪)의 아들로 태어난 양복수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하여 어른 을 공경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6세 때에 아버님이 병을 얻어 위중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고 후일에는 할복까지 하였 다. 부모가 물고기를 즐기므로 겨울에는 얼음을 깨서 고기를 잡아드렸다 한 다.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의 효성 에 감동한 호랑이가 따라 다니며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이 비각은 낮은 토 단에 석축을 돌리고 원주형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공포는 익공계 포 작형태에 겹처마를 하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비 전면에 「유명조선효자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양복수지비 (有明朝鮮孝子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副摠管梁福洙之碑)」라 음각되어 있다.
18) 진월 오사리 사평 비군(2기)

진월면 오사리 오추마을에서 사평마을 쪽으로 농로를 따라 가면 사평 마 을 조금 못미쳐 추동마을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온다. 이 갈림길에서 사평마을 쪽으로 약 10m 정도 가면 길 바로 옆에 2개 의 비가 나란하게 서 있다. 첫 번째 비는‘부인함 안조씨자선불망비(夫人咸安趙氏慈善不忘碑)’로 향좌에‘갑자삼월삼일(甲子三月三日)’, 향우에 ‘진월면소작인입(津月面小作人立)’이라고 새겨 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60cm, 너비 40cm, 두 께 22cm이다. 두 번째 비는‘최관현자혜불망비 (崔琯鉉慈惠不忘碑)’로 향우에‘갑자십일월삼일 오사입(甲子十一月三日烏沙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58cm, 너비 38cm, 두께 20cm이다.
19) 효자 안진묵 정려비

진월면 차사리에 있는 이 효자비는 안진묵(安鎭默)의 효행 을 기리기 위해 1893년(고종 30)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는 처음에는 비각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9년 마을 저수지 공 사로 인하여 수몰되자 저수지 위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현재 비각은 없고 비만 세워져 있다. 비 전면에‘효자 증동몽교관 조봉대부안진묵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安鎭默之閭)’ 라 음각되어 있고 후면에 기우만(奇宇萬)이 쓴 그의 행적이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 193cm, 비신 높이 143cm, 너비 56cm, 두께 23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