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기타유적과 유물묘(墓)

분류 : 기타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묘(墓) 1) 최산두묘 이 묘는 봉강면 부저리 저곡마을에서 부현 마을로 가기 전 왼편 능선 중턱에 위치한다. 무덤 앞에 석인 상이 있고, 한단 아래에 망주석이 있다. 봉분은 직경 6.5m, 높이 1.7m이며 원형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의정부사인신재 최선생산두지묘 영인이천서씨부 (議政府舍人新齋崔先生山斗之墓令人利川徐氏 羅)'라고 음각되어 있다. 최산두는 조

묘(墓)

1) 최산두묘

이 묘는 봉강면 부저리 저곡마을에서 부현 마을로 가기 전 왼편 능선 중턱에 위치한다. 무덤 앞에 석인 상이 있고, 한단 아래에 망주석이 있다. 봉분은 직경 6.5m, 높이 1.7m이며 원형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의정부사인신재 최선생산두지묘 영인이천서씨부 (議政府舍人新齋崔先生山斗之墓令人利川徐氏 羅)'라고 음각되어 있다. 최산두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농중자(新齋∙ 籠中子)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가 되어 25세에서 30세까지 성균 관에서 공부를 하여 도덕∙문장으로 이름이 나자 김인후, 유희춘 등이 찾아 와서 글을 배웠다. 151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14년에 홍문 관저작, 1516년에 박사로 승진하고 이듬해 홍문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 였다. 1518년에 다시 수찬이 되고 보은현감이 되었다. 승정원에서『성리대 전(性理大全)』을 강할 사람 26인을 선발하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갔다. 1519년 이조정랑∙장령∙사인으로 승진하였으나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 배되었다가 1533년에 풀려 나온 뒤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장에 뛰 어나 유성춘∙윤구와 함께‘호남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신재집(新齋集)』이 있다.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제향되었다.
 
 

2) 황현묘

매천 황현(黃玹)은 한말의 문장가요, 시인이며 우 국지사이다. 1855년(철종 6)에 봉강면 서석마을에 서 출생하여 1883년(고종 20)에 과거에 급제하였 다. 고종말기에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전념하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하여 절명시 4 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56세였 다. 황현의 묘가 위치한 곳은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 서북쪽 산기슭이다. 비문 정면에‘애국지사황현지묘(愛國志士黃玹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봉 분의 직경은 3m이며, 높이 1.4m이다. 황현의 묘는 장수황씨 묘역에 위치 하고 있으며 묘역 입구에 매천 황현을 추모하는 영모재가 있다. 영모재 건 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3) 봉강 신룡리 형제의병장의 묘

봉강면 신룡리 신촌 마을 뒤 산기슭에 있는 강희 보∙강희열(姜希輔∙姜希悅) 형제의 묘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신룡리 신촌마을 출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백의창의(白衣倡義)하 여 인근 마을의 장사 100여 명을 모았다. 그리고 이 군사를 이끌고 단성(지금의 경남 산청군)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백부인 강인상(姜麟祥)을 구원하기 위하여 달려갔다. 1593년 6월에 왜가 10만 대군 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때는 명과 왜가 강화를 위한 외교적 접 촉을 벌이고 있던 때였으므로 관군들은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어 진주 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강희보와 석주관을 지키던 희열도 곧 진주성으 로 달려왔다. 이 전투에서 희보∙희열∙희원∙희복의 4형제가 순절하였다. 1970년 진주강씨 문중과 광양의 향유 및 유지들이「의병장 강희보∙강희 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발기 창립하여 다음 해에 국가보조로 묘소를 보수 하였고, 1974년에는 광양군비의 보조와 독지가의 찬조로 묘비가 건립되었 다. 무덤은 쌍분이며, 무덤 앞에 상석, 비석, 장군 석인상 등이 있다. 비문에 는「증호조좌랑의병장강공희보 증병조참의의병장강공희열 형제지묘(贈戶 曺佐郞義兵將姜公希輔贈兵曺參議義兵將姜公希悅兄弟之墓)」라고 적혀 있다.
 
 
 

4) 채구연묘

채구연묘(蔡九淵墓)는 진월면 선소리 내망 마을에 있다. 채공은 선조 24년(1591)부터 밀 양부사로 봉직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성지를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황산 뒷길을 사수하 다가 전세가 불리 해지자 성의 창고를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후손들이 1971년 국가보조를 받아 출생지인 진월면 망덕산에 묘를 정화하였다. 묘 비, 상석, 석물이 있고 당시 순절한 10기의 묘가 함께 있다.
 
 
 

5) 조희교묘

중마동 와우 마을에 위치한 이 무덤은 1905 년 당시 광양군수로 재임하고 있던 그의 아들 조예석(趙禮錫)이 부친 조희교(趙熙敎)를 위 해 만든 것이다. 능선 말단부의 비교적 완만한 정상부를 다듬어서 비교적 넓은 묘역을 조성 하고 동서 방향으로 약 25m 길이의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30~70m 크기의 거칠게 다듬 은 할석으로 쌓은 것인데 1~2 단으로서 30~40cm 높이에 불과하다. 이석축 안쪽에 위치한 무덤은 직경 약 4m, 높이 약 1.7m 크기의 즙석분(葺石 墳)인데,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청석을 이용하여 봉토 위를 완전히 덮어줌 으로써 마치 얼음덩어리를 잘라 만든 에스키모인들의 이글루를 연상하게 한다. 즙석은 모두 6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아래층의 기연석은‘ㄴ’자 형태로 다듬어서 단처럼 약간 도드라지게 하였고 2~6 층까지는 장방형에 가까운 사다리꼴이며 정상 중앙에는 가마솥 뚜껑에 반월형의 손잡이가 달 린 것 같은 모양을 한 덮개돌이 얹혀 있어 전체적으로 궁륭형을 유지하게 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중앙에 상석이, 서쪽에 비석이, 좌우에 망주석이 배 치되어 있다. 상석은 길이 128cm, 너비 90cm, 높이 28cm 크기의 청석제 로서 전면에‘가증종이품가선대부규장각제학조공휘희교지묘(加贈從二品 嘉善大夫奎章閣提學趙公諱熙敎之墓)’가 음각되어 있다. 비석은 높이 130cm의 크기로서 전면에‘증가선대부병조참판행첨중추부사한양조공희 교지묘(贈嘉善大夫兵曺參判行僉中樞府事漢陽趙公熙敎之墓)’가 음각되어 있다.
 
 
 

6) 은장묘(銀匠墓)터

골약동 황금리 황방마을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 라 북으로 1.5km 정도 올라가면 황곡 저수지가 있다. 산 경사면 4~5부 지점에 위치한 이 무덤은 경사면 아래쪽에 축조되어 있 는 석축만이 비교적 잘 남아있을 뿐, 무덤 자체는 봉토의 유실로 말미암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묘광부분이 약간 함몰되어 있 고, 묘광 주변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화강암이 분쇄된 작은 암석 부스러기 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묘역은 쉽게 확인된다. 묘역의 전체 범위는 길이 8m, 너비 4.5~6m의 규모로서 경사면 아랫부분인 서쪽 끝부분에 길이 4.5m, 높이 50~70cm 규모의 석축이 남동-북서방향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축은 30~50cm의 할석을 거칠게 쌓아 만든 것으로서 군데군데 붕괴되어 있다. 이 석축면 끝에서 약 2.5m의 범위는 평탄하게 있고 그 위쪽으로 약 2m 범 위는 약간 함몰되어 있어 묘광으로 판단된다. 묘광으로 추정되는 이 함몰부 는 남서-북동방향이고 그 위쪽으로는 약 2m 가량 비교적 평평한 부분이 계속되다가 산 경사면으로 이어져 올라간다. 이 무덤은‘은장이 무덤’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이 일대에서 금이 많이 산출되었는데 당시 금을 캐 는 기술자가 죽어 묻힌 무덤이라 전하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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