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기타유적과 유물기타유적

분류 : 기타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기타유적 1) 光陽김 始殖址 소재지 : 태인동 궁기 829-1 시대 : 조선 ‘김’의 시식에 대해서는 완도∙조약도의 김유몽, 완도 고금면 용장리 정시원 등의 시식설과 광양의 김여익(1606~1660년) 시식설 등이 있다. 김여익 은 영암 서호면 몽해에서 태어나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준 수사를 따라 청주에 이르렀으

1) 光陽김 始殖址

  • 소재지 : 태인동 궁기 829-1
  • 시대 : 조선
‘김’의 시식에 대해서는 완도∙조약도의 김유몽, 완도 고금면 용장리 정시원 등의 시식설과 광양의 김여익(1606~1660년) 시식설 등이 있다. 김여익 은 영암 서호면 몽해에서 태어나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준 수사를 따라 청주에 이르렀으나 항복하자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 동백동을 거쳐 인조 18년 (1640) 태인도로 들어가 살면서 海衣를 시식하는 등 명리를 떠나 살았다. 이러한 사정은 숙종 40년(1714) 당시 광양현감이 었던 허심(1713. 4~1714. 9 재임)이 지었다는 김여익의 묘표에 적혀 있 다. 이 묘표는 남아 있지 않으나 김해 김씨 족보에 남아 있다.
 
 
 

2) 광양읍 덕례리 예구 시묘(侍墓)집

 
  • 소재지 : 광양읍 덕례리 예구
  • 시대 : 조선
이인로(里仁盧)란 당호(堂號)의 이 건물은 1700년경 孝子김 치조(金致祚)가 모친을 장사지내고 그 아래에 노막(盧幕)을 짓 고 3년간 시묘했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865년에 건립한 건 물이다. 이후 여러차례 개조되어 오늘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좌우 1칸째에 각기 온돌방을, 중 앙간에 대청을 들이고 전퇴(前退)에는 툇마루를 깔았다. 장대석 으로 두른 낮은 기단위에 고복석(鼓腹石)의 초석을 놓고 원형기 둥을 세웠으며, 주두(柱頭) 하단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굴도리를 올려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 들어가 는 출입문에는‘孝子通政大夫金海金致祚之閭’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3) 월파대(月波臺)

 
  • 소재지 : 광양읍 우산리 월파
  • 시대 : 조선
월파대는 서신구(徐藎龜, 1633~?)가 낚시를 하 던 곳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월파대라고 칭했다고 한다. 현재는 바위 위에 유적비만 세워져 있다. 1970년 4월에 세워진「月波徐公遺蹟碑」의 비문에 의하면 서신구(徐藎龜)의 字는 聖瑞, 號는 月波, 本 貫은 利川이다. 元肅公訥의 후손이며, 岩淵處士 서천일(徐千鎰)의 高孫이다.
 
 
 

4) 학사대(學士臺)

 
  • 소재지 : 옥룡면 동곡리 동동
  • 시대 : 조선
동동마을 앞 玉龍川산경사면에 위치한 學士臺 는 1519년 己卯士禍에 연루되어 同福에 유배되었 던 新齋崔山斗가 어린시절 修學하였던 자연암굴 이다. 이 암굴 내부는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넓이 이며,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자연수가 흘러나온 다. 또한 이 암굴 상단 5m지점의 암면에는‘學士 臺’라는 자필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이 학 사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崔山斗가 10년을 계획하고 이곳에서 修學하였는 데 자신감이 생기고 지루하기도 하여 9년만에 굴을 나와 밖의 풍경을 보고 문득 외우기를‘泰山壓後天無北’이라 한 다음 이음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데 한 초동이 나타나 그의 詩를 받아‘大海當前地失南’하였다는 것이다. 이 에 崔山斗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우치고 1년을 더 공부하고 나와서 성공하 였다고 한다.”지금은 이 암굴 바위 위에 5인이 앉을만한 亭閣을 세우고 '學 士臺'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있다.
 
 
 

5) 진상면 비평리 비촌 유적

 
  • 소재지 : 진상면 비평리 비촌
  • 시대 : 조선
용계촌에서 비촌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하 탄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유적은 삼거리에 서 서쪽 약 200m 지점의 밭에 위치한다. 남동쪽 약 450m 지점에 불암산성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수어댐이 위치하고 있는데, 만수가 되면 바로 아 래까지 물에 잠긴다. 이곳에는 건물지의 축대로 보이는 여 러 단의 석축열이 약 100cm 높이로 남아 있다. 주변에는 파도문과 복합문의 와편 등 주로 조선시대의 와편이 산재 해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창터’라고 부르고 있다.
 
 
 

6) 광양읍 세풍리 세승 우물

 
이 우물은 광양읍 세풍리 세승마을에 있으며, 우물의 평 면형태가 방형이다. 크기는 가로 174cm, 세로 193cm, 깊이 220cm이다. 우물의 축조방식은 4면 모두 면석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면석 아래는 할석을 이용해 쌓아 올렸고 바닥은 자연암반층을 그대로 사용 하였는데 고르지 않다. 면석 안쪽에‘병인년십이월□일(丙寅年十二月□ 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우물의 축조연대로 판단되나 마모된 부 분이 있어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7) 광양읍 용강리 와룡 우물

 
이 우물은 광양읍 용강리 와룡마을에 있으며, 평면이 방형 에 가까운 형태이다. 크기는 가로 170cm, 세로 167cm, 높이 71cm이나 최근에 시멘트로 보수한 것까지 포함하면 높이는 119cm이다.
우물의 축조방식은 4면 모두 80~90cm 크기의 장방형 면석과 20~30cm 크기의 할석을 가로쌓기 하여 2~ 3단으로 만들었다. 바닥면은 자연 암반층을 그대로 사용하 였는데 고르지 않다.
 
 
 

8) 진월면 마룡리 용소 우물

 
이 우물은 진월면 마룡리 마룡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140×140×90cm 크기의 판석조 우물로, 바닥에는 자연 암 반이 깔려 있다. 각 면의 벽은 높이 40cm, 두께 13cm의 판석 2매씩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판석 상부에는 20cm 높이로 시멘트가 발라져 있으며, 현재도 민가의 우물로 이용되고 있다.
 
 
 

9) 진월면 선소리 선소 우물

 
이 우물은 진월면 선소리 선소마을에서 이정마을로 가는 굴다리 오른편 남해고속도로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주 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큰 판석형의 석재로 되어 있다고 하 는 것으로 미루어 정자형(井子形) 석조우물로 추정된다. 근래까지 이정마을과 선소마을 주민들의 공동 우물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360×360cm 크기의 콘크리트 벽 이 형성되어 있고 뚜껑이 덮여 있어 원래의 형태를 파악하 기가 힘들다.
 
 
 

10) 진월면 선소리 이정 우물

 
이 우물은 진월면 선소리 이정마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 다. 170×170×110cm 크기의 판석조 우물로 현재도 수량 이 풍부하여 빨래터로 이용되고 있다. 벽은 4벽 모두 3단으 로 구성되었는데 1단 45cm, 2단 45cm, 3단 20cm로 상층이 가장 낮다.
 
 
 

11) 진월면 진정리 진목 우물

 
이 우물은 진월면 진정리 진목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167×175× 112cm 크기의 판석조 우물로 바닥 은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다. 원래 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현재 는 60×12cm, 52×12cm 크기의 판 석이 2단을 이루고 있다. 한쪽 면에 ‘계유오월 일(癸酉五月日)’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고, 남쪽 상부에는 출수 구가 마련되어 있다.
 
 
 

12) 진월면 선소리 선소지(船所址)

 
이 선소는 진월면 선소리 선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선소는 임진왜란 중에 전라좌수영 관하 오 관 오포의 하나인 광양현의 수군기지로서 이용되 었다. 광양 선소에서 배를 만들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임진장장(壬辰狀章)』이 유일하다. 즉 1594년 1월의 기록에 1593년 12월 당시 광양 선 소에서 전선(戰船) 4척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대활약을 한 거북선은 좌수영, 순천, 방답진 선소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 정하고 있어 광양 선소에서 거북선은 건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 다. 조선후기의 법전인『속대전(續大典)』에는 군선의 배치현황이 정리되어 있는데 광양에는 전선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이 배치되 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광양 선소는 순천, 흥양, 보성, 낙안선소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배가 제작된 곳으로 중요한 조선소로서의 역할 을 하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조선후기까지 군선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 으로 보아 선소의 역할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선소마을 남서쪽에 위치한 외망마을에서는 지 금도 배를 만들고 있다. 광양 선소는 해안선이 내륙쪽으로 깊숙하게 만입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에 산들이 많아 배를 만들기 위한 목재를 구하 기 쉬우며, 섬진강을 끼고 있어 내륙쪽으로 연결되는 교통로 역할을 하는 지역에 있는 등 선소로써 지녀야 할 입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13) 진상면 어치리 야철지

 
진상면 어치리 내회마을에서 싸목재를 향하여 등산로로 2km 정도 올라가면 야철지가 있다. 해발 고도상으로는 500m에 가까운 고지대이다. 야철 지는 용소계곡 조금 못 미쳐서 산길 좌측 아래로 15~20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이곳에는 제철로 와 작업장 및 생활공간 등이 확인되었다. 제철로가 위치한 지점의 주변은 구획석과 석축으로 조성된 길이 9m, 폭 4.2m 정도의 장방형의 평탄면이 있으 며 제철로는 장방형 평탄면의 중심부에 있는데, 서남쪽 축대에 치우쳐 위치 한다. 축대 아래로는 노벽편들이 떨어져 있는데, 노벽이 용해되어 생성된 철재(鐵滓)들이 노벽 내면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제철로는 하단 일부만 잔존하고 있는데, 하단 직경 110cm, 높이 35cm, 노벽 두께 25cm 정도이 다. 노벽은 할석으로 만들었는데, 할석 사이의 빈틈은 적갈색 점토로 메꾸 고 있다. 노벽의 내면에는 노벽이 용해되어 생성된 철재들이 붙어 있으며 제철로의 전방에 바로 인접하여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제철로가 위치한 인 근지역에는 다양한 활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제철에 필수적인 임산 자원과 수자원이 풍부함을 알 수 있다.
 
 
 

14) 진상면 황죽리 야철지

 
진상면 황죽리 구황마을에서 백운산 억불봉쪽으로 비포장도로와 계곡 등산로를 따라 2.5km 정도 올라가면 야철지가 있다. 이곳은 해발 고도상으 로 450m 정도의 고지대이다. 야철지는 등산로에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는데, 야철지에서 남쪽으로 불과 10m 정도 떨어져서 풍 부한 수량의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에는 제철로 1 기와 작업장 및 생활공간 등이 있다. 현재 제철로는 비 교적 잘 남아 있는데, 규모는 하부 직경 1m, 높이 약 90cm이다. 현재 노벽은 동∙서쪽이 잘 남아 있는 편이 고, 남∙북편은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노의 주 변은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제철로를 중심으로 석축에 의해 장방형의 석 축 공간이 구획되어 있다. 이 공간은 규모가 길이 8m, 너비 170cm 정도이 다. 노의 축대 남쪽으로는 4×5m의 평탄공간이 있는데, 유출재가 다량 산 재하고 있다. 유출재가 남쪽 축대 아래에 집중적으로 퇴적되어 있다는 것은 제철로 저부의 유출구가 남쪽으로 뚫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유출재 는 잘게 파쇄된 상태로 집중적으로 퇴적되어 있었다. 노 남쪽으로 20m 정 도 떨어져서 팔각장방형의 평탄면이 있다. 이곳은 야철장인들의 주거공간 으로 보인다. 현재 유적 현황은 윗면 너비 155cm, 밑면 너비 100cm, 높이 90cm의 노터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노 주변 16×13m 범위는 평탄 한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석회석, 규석, 철광석들의 슬래그가 산재하고 있다. 이 야철지는 1906년 광양지방에서 봉기하였던 백낙구(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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