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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물충의(忠義)

분류 : 조선시대의 인물

간략설명 : [조선시대의 인물] 충의(忠義)

충의(忠義)

의병장 강희보(姜希輔)

: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봉강면 신촌에서 강천상(姜天祥)의 아들로 태어남. (※강천상은 부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직위는 후에 추존된 것으로 보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인 희열(希悅)과 더불어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인근 마을장사 100여명을 모았음. (백의로 창의한 그의 밑에 100여명의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평소 강희보의 덕행과 학식을 추측케 하여 줌) 그는 군사를 이끌고 그에 앞서 단성(丹城, 경상도 산청군에 속함)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백부인 강인상을 구하기 위하여 달려가 함께 싸웠음. 한편 1593년 6월에 왜가 10만대군으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는데 이때는 명과 왜가 강화를 위하여 외교적 접촉을 벌이고 있던 때였으므로 관군들은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어 진주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음. 이 당시 강희보는 강인상의 아들이자 그에게 사촌동생이 되는 희원∙희복과 함께 진주성의 창의사 김천일의 휘하에 들어갔음. 한편 구례의 석관주(하동∙구례∙광양 사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던 강희열(姜希悅, 강희보의 동생)도 곧 진주성으로 달려왔음. 1593년 6월에 21일간의 왜군과의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강희보는 1593년 6월 27일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 전투에서 희보∙희원∙희열∙희복(년장순)의 4형제가 모두 순절하였음. 뒷날 조정에서는 희보∙희열 형제를 진주 창열사(彰烈祠)에 배향하였고, 영조 40년에는 희보에게 호조좌랑(정6품)이, 희열에게 병조참의(정3품)가 추증되었음. 1970년 진주강씨 문중과 광양의 유림 및 유지들이「의병장 강희보∙강희열 형제장군 숭모회」를 발기 창립하여, 다음 해에 국가보조로 묘소를 보수하였고, 1974년에는 광양군비와 독지가의 찬조로 묘비가 건립되었으며 그 이후 2번에 걸쳐 묘역정화 사업이 이루어져오다 1998~ 2003년에 걸쳐 묘역아래에 형제의병장을 배향하는 사당을 건립하였음.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 봉강면 신촌 출신. 원래 풍자가 수려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는데 무과에 합격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인 강희보 보다 앞서모집한 장사를 이끌고 단성(丹城; 경상도 산청군에 속함, 경상도에서 호남에 이르는 요역)에서 백부인 강인상과 더불어 왜군을 저지하였음. 흔히들 희보∙희열 형제는 함께 의병을 일으켜 그 행동을 늘 함께 했던 것으로 이야기되었으나 희보는 순수한 백의창의였던데 비하여 이미 무과에 합격한 희열은 일정한 군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음. 따라서 강희보를 중심으로 광양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희보의 지휘아래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였으며 이때 희열은 석주관(石柱關)에 여러 읍(邑)의 군사를 지휘하고 있다가 그 군사를 이끌고 희보의 뒤를 이어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였음. 또한 그 아들인 승훈 역시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였다고 전함. 형 희보의 뒤를 이어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였던 그는 1593년 6월27일 형이 순절하자 복수를 다짐하며 더욱 맹렬히 싸우다 동년 6월 29일 성의 함락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음. 진주 창열사에 배향되었고, 영조때 병조참의(종3품)에 추종되었음. 현재 그의 묘는 봉강면 신룡리 신촌마을 뒷산에 형 희보와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음.

김온(金溫)

: 광양읍 덕산 출신. 임진왜란때 수군 광양선(光陽船)의 도훈도(都訓導)로써 1592년 7월 11일 이순신의‘제3차출정’때 안골포전(安骨浦戰)에서 용감히 적에게 진격 하다가 김담화(金談化)와 같이 전상을 입었음.

김천록(金天祿)

:골약동 금곡 출신. 여주판관으로 있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운송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김천일∙최경희장군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순절함. 조정에서 선무원종공훈록에 2등훈반열에 기록하고 1891년 조정에서 정려를 세웠는데 당초 광양읍 용강리 국도변에 있었으나 1982년에 출생지인 골약동 금곡마을앞으로 이전하고, 동년에 유당공원에 이건사적비를 세움

김연우(金延佑)

: 경주 김씨로 자(字)는 연수(延壽)이며 현령(縣令) 금(嶔)의 아들. 효성이 지극하고 친구에 대한 의리가 두터웠으며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났었음. 1579년(선조12)에 무과에 급제하여 전부장(前部長. 5위에 속한 종6품의 무관)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아우인 부장(副長) 한우(漢佑)와 함께 이여송(李如松) 진(陣)에 합류하여 평양성 탈환에 참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전사하였음.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원종훈보다 공이 큰 훈공)록에 올랐음.

김두남(金斗南)

: 임진왜란때 수군 별군(別軍)으로 광양선을 타고 1592년 7월 11일 제3차출정때 안골포전(安骨浦戰)에서 유조(柳條)와 같이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음.

김담화(金淡化)

: 임진왜란때 수군 광양선 격군(格軍)으로 1592년 7월 11일 안골포전에서 김온(金溫)과 같이 전상(戰傷)을 입었음.

김대례(金大禮)

: 1573년 진월면 송현 출신. 충신. 김해인(金海人). 자는 여대(汝大). 호는 성재(誠齋). 현감 중량(仲良)의 손이며 가선대부 한호(漢浩)의 아들. 1598년 정유(丁酉)재란시 당년 25세로 묘도전투에서 순절함. 선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시 섬진강 입구에서 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둠. 선무원종공신록에 등재되었으며 1856년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에 공신각 정려비가 세워졌음.(1968. 5월 발행한『전남도지2』와『朝鮮輿勝覽』에 기록되어 있음.)

김사례(金師禮)

: 1570년 진월면 송현 출신. 공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중(汝仲), 공신 김대례(金大禮)의 친형. 훈련원 주부(主簿). 임진왜란시 충무공좌수영 진에서 많은 승전을 하여 선무원종 공신 2등에 올랐으며, 호남삼강록에 등재됨.

김헌룡(金憲龍)

: 광산 김씨로 자(字)는 문겸(文兼)이고 조학(早學)의 손자. 원래 용맹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음. 임진왜란시 부산에 쳐들어온 왜장에게 큰소리로 꾸짖었음. 조정에서 장계(狀啓)의 소식을 듣고 진별장(津別將)의 벼슬을 내렸음.

김덕룡(金德龍)

: 광산 김씨로 자(字)는 문옥(文玉)이고 용맹스럽고 책략적이었음. 임진왜란시 정병(精兵)을 이끌고 1592년 7월 8일‘이순신의 3차출정’시한산섬 싸움에서 왜적을 격파하였음. 조정에서 그 공으로 동래부사(東萊府使)를 명하였음.

김경준(金景俊)

: 김해 김씨로 1869년(고종6. 己巳) 3월 24일 광양민란이 일어났을 때 70여명의 난도들에게 현감 윤영신(尹榮信)이 붙잡혔으나 어렵게 탈출하여 많은 반격군을 조직하여 광양성을 수복하였는데, 이때 김경준의 공이 크게 인정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추서되었음.

박대복(朴大福)

: 1567년 진월 신아리 아동 출신. 자는 선부(善夫). 생원 기현(綺玄)의 손자임. 1582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관직을 역임함. 1592년 임진왜란시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한산도대전에 공을 세우고 전사함. 선무원종공훈록에 등재됨.

박성춘(朴成春)

: 승평 박씨로 1573년(萬曆癸酉)에 무과에 합격하여 주부(主簿. 從6품)가 되었음. 임진왜란 당시 상주포(尙州浦)의 권관(權官)으로서 이순신을 따라 1592년 7월 8일‘제3차 출정’때 거제도 앞 한산섬 앞바다에서 왜의 적선에 돌격하다가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음. 절충장군(折衝將軍)을추증받았고,『 선무원종1등훈록』에올랐음. 죽기전에아들 이량(以良)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고 눈을 감았음.

박이량(朴以良)

: 박성춘의 아들.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면서 훈련첨정(訓練僉正. 종4품관직)을 받았는데 아버지 성춘이 전사하자 시체를 업고와서 빈소에 안치한 후 즉시 가동(家童)을 인솔하여 순천부 권준(權浚)과 협력하여 토량에서 왜군을 쳐부수며 크게 이기고 돌아옴으로서 그 공으로 덕진관(德鎭官) 적량수군도위(赤梁水軍都尉)를 제수받았음. 그 후 계속 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하니 과의교위(果毅校尉)∙소위장군(昭威將軍)∙건공장군(建功將軍)을 추증받고『선종원종훈2등록』에 올랐음.

백내은(白內隱)의 손자 (이름미상)

: 임진왜란때 수군으로 광양선의 사부(射夫)였는데 1592년 5월 29일‘이순신의 제2차출정’때 당황포 해전에서 남산수∙서천동 과 같이 전상을 입었음.

백낙구(白樂九)

: 호(號)는 운정(雲亭).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원주∙제천∙청풍∙횡성∙홍천 등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이 일어났음. 1906년 가을, 광양에서는 백낙구∙김상기(金相璣)∙이항선(李恒善)∙노원집(盧元執)∙채상순(蔡相淳)∙유병우(柳秉禹) 등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 소식을 듣고 수백명이 참가하였음. 거기서 백낙구는 사령장(司令長)에 추대되었음. 그리하여 각 지방에 격문을 돌리고 11월 6일 밤 순천읍으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주모자 7명이 체포되어 강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석방되었으나 고문으로 눈이 멀었음. 그러나 다시 교자를 타고 의병을 일으켜 전북 태인군 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음. 『매천야록』에 의하면 백낙구 는 전주 사람인데 광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음.

서천동(徐千童)

: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 광양선의 방포장(放砲匠. 포를 쏘는 수군)이었는데 1592년 5월 29일‘이순신의 제2차출정’때 당황포 해전에서 남산수와 같이 전상을 입었음. (당시 광양선의 수군은 135명부터 155명 정도였을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없어 그 이름을 알 수 없음)

선동(先同)

: 성씨를 알 수 없음. 임진왜란때 수군으로 광양선의 격군(格軍. 사공의 일을 돕던 수군) 이었는데 1592년 7월 11일‘이순신의 제3차출정’안골포전에서 김온∙김담화 와 같이 전상을 입었음.

서상설(徐尙卨)

: 이천 서씨로 진월면 송금출신. 1629년 무과에 합격하였는데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적을 막아 싸운 공이 많았음. 대구진영장(大邱鎭營將), 백령수군절도사(白領水軍節度使)를 역임하였고, 후에 호가공신(扈駕功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贈)하였음. (10대 손,옥룡면 죽천리 서병기)

서명팔(徐命八)

: 중마동 오류 출신. 이천 서씨로 자(字)는 사구(士久)이며 처사 종로(宗魯)의 아들. 공은 충효심이 지극하고 지략이 뛰어났음. 1728년(英祖4년)‘ 정희량(鄭希良)의난(亂)’이 순천에까지 확대되자 의병을이끌고 가서 이채한(李埰漢. 절충장군)∙송흠명(宋欽明. 상호군)과 합력전진할때 공(公)이 모사가 되어 적을 참살하는데 공이 많았음. 그 공을상계하여‘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을 제수받았음.

성기수(成耆壽)와 성태수(成台壽)

: 성기수는 창녕 성씨로 자(字)는 희원(希遠)이고 무정공(武靖公) ‘윤문’의 아들. 선조조에 무과에 합격하였음.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는 연해안의 경비를맡은 장수가 되었고, 일본으로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큰공을 세웠음. 그 공으로 지중추(知中樞. 정2품무관)가 되었으며 그 아우 성태수(成台壽)도 무과에 합격하여‘강계병마 첨제절사’(江界兵馬僉節制使. 鎭營에 속한 3품의 무관직)를 역임하였음.

승병장(僧兵將) 성휘(性輝)

: 속성(俗性)은 기씨(奇氏).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1597년 8월 8일 초계(草溪)를 떠나 진주∙광양두치(섬진진)∙화개∙구례∙곡성을 거쳐서 순천에 도착하였음. 순천에서 그를 찾아온 중 삼혜(三惠)에게 승군을 조직하도록 하였음. 이로 인하여 옥룡면 동곡리에 있는 송천사 주지 성휘는 승군을 조직하여 중흥사에서 훈련한 후 우돌격장(右突擊將)이 되어 강희열 장군과 함께 섬진강 위의 요새인 석주관(石柱關)을 지키며 많은 적을 격퇴하여 공을 세웠음.

장봉옥(張峰玉)

: 1752년 광양읍 세승마을 출신. 전라수군절도사

회은(悔隱-應俊)

: 승병장이며 속성은 기씨(奇氏). 응준(應俊)은 법명(法名)인데 남원에서 태어났으나 옥룡면 동곡리에 있던 송천사(松川寺)의 스님이었음. 그는 벽암대사(壁巖大師)의 제자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스승을 따라 전공(戰功)을 세워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많은공을 세워 가의(嘉義. 종2품)∙자의(資憲. 정2품)∙정헌(正憲. 정2품)으로 승진되었다. 1672년(顯宗13)에 86살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문도(門徒)인 처상(處祥)∙광학(廣學)∙등팽(等)∙옥청(玉淸) 등이 처능(處能)을 찾아가 비의 명문(銘文)을 부탁하여 1677년 송천사에 회은장로비(悔隱長老碑)를 세웠는데 절은 불타고 없어졌으나 그 비(碑)는 지금까지 송천사지(松川寺址. 옥룡면 동곡리 동천가의 사지) 에 남아있음.

송홍렬(宋弘烈)

: 선조때 무주부(武主簿)이며 제주판관(濟州判官)으로 부임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음.

이채한(李埰漢)

: 완산 이씨로 자(字)는 하향(厦鄕). 기개가 강직하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났음. 정희량이 순천에서 난을 일으켜 그 난이 확대해질 때 사위인상호군 송흠명과 더불어 지기인 서명팔과 함께 의거하여 난을 진압하였음.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5위장절충장군(五衛將折衷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제수하고 사후에 병조참의를 추증하였음.

이준(李浚)

: 원주 이씨이며 자(字)는 순지(順之). 선조 초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였음.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광양읍 용강리 마로산성(馬老山城)에 진을치고 적의 대병을 격파하였음. 그 공으로 의주부사(義州府使)를 제수하였으나 거절하였음. 그 후 인조(仁祖)때 청(淸)이 황제를 칭(稱)하여 우리나라가 종속할 것을 위협하자 이준은 장계(狀啓)를 올려 화청을 거절하고 청의 사신을 참(斬)할 것을 주장하였음. 그가 죽은 후에는 그 공을 기리기 위하여월남서원(月南書院)을세워제사지내고있음. 『(호남의절록』의기록)

이근구(李根求)

: 완산 이씨로 자(字)는 덕회(德晦). 1568년(고종5)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발하자 인근 7읍의 종친들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척양(斥洋)을 주장하고, 사인(士人) 민의행(閔誼行)과“의리의 경중에 따라 살고 죽는것이 선비”임을 서신으로 왕래하고 함께 전주에 이르니 진사 남궁렴(南宮濂)이 그 장한 의리를 시로서 찬양하였음.

임우화(林遇華)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의병장 강희보의 부장(副將)이 되었음. 『진양지』에 임우화는 경서에 박통하고 담략을 겸비하여 진중의 여러 장수들이 정중하게 대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강희보의 부장으로 참전하였다가 1593년 6월22일 순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안방준의『음봉전서(陰峰全書)』에는 그가 강희보의 명령으로 응원군을 청하러 성밖에 나갔다가 왜군에게 붙잡혔으나 하동에서 탈출하였다고 되어있음.

정수천(鄭壽天)

: 1869년(고종6. 己巳)에 광양민란시 현감 윤영신이 붙잡혔으나 어렵게 탈출하여 반격군을 조직하여 광양성을 수복하였음. 이때 정수천은 김경준 과 더불어 광양성 수복에 큰 공을 세웠음. 그 공으로‘통정대부’가 되었음.

함덕립(咸德立)

: 강릉 함씨로 자(字)는 사인(士人). 무주부(武主簿)로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권율장군 막하에 들어가 행주대첩(幸州大捷)에 큰 공을 세우고 적의 총에 맞고 순직하였음.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올라있음.

황대업(黃大業)

: 창원 황씨로 진상면에서 태어났음.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후인 1594년에 둘째동생 부호군(副護軍) 성업(性業)과 막내동생 통정(通政) 사업(嗣業)과 함께 가동(家)을 거느리고 왜적에게 기습작전을 폈으나 적에게 붙잡혀서 일본까지 끌려갔음. 만년에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통정에 이르렀음.

이가우(李嘉宇)

: 완산 이씨로 1854년(철종5)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훈련판관(宣傳訓練判官)을 역임하면서 항상 직언을 서슴치않고 충언을 함으로서 세도정치에 휩쓸린 왕정복구를 위해 충정을 다하였음.

이홍무(李烘武)

: 전주 이씨로 자(字)는 달오(達吾). 증 가선장례원부향(贈嘉善掌禮院副鄕)으로 품성이 수범하고 덕(德)이 출중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벗에게 신의를 다하였음. 매년 명절이 되면 60여호의 마을에 고기와 쌀을 나누어주었음. 1898년(고종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현감인 조중협(趙重燁)이 초청, 수습책을 상의하고 있을 때 난중(亂衆)이 돌입하니 좌우실색(失色) 하였으나 이홍무만이 나서서 난중을 설득하니 노기가 등등하여 총을 겨누고 쏘려하였으나 태연하게‘백성을 돌보지 않고는 다스릴 수 없다는 것’과‘그러하지 못할때는 자기가 먼저 죽을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득하여 대화로서 평화롭게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음.

채구연(蔡九淵)

: 채구연은 조선중종 23년(1528년) 2월 14일 광양현 진하면 장치리(진월면 망덕리 장재)에서 출신. 자는 자정(自靖), 호는 청허(聽虛) 나이 36세 되던 해인 명종 19년 갑자년(1564년)에 과거에 합격함. 선조 신묘년(1591년)에 밀양부사(그때 나이 64세)에 임명. 노쇠에도 불구하고 부임 즉시 성지를 수리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공수를 굳게 하였으며 1592년 4월 과로로 밀양부사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박진(朴晋)이 임명되었는데 밀양백성들이 난국을 감당할 수 있는 적임자인 채구연을 다시 유임시켜 줄 것을 경상감사에게 진정, 하회를 기다리던 중 동년 4∙15일 부산∙동래∙울산이 왜구에 점령당하자 밀양부사 박진과 함께 전투에 임하다 성이 함락되자 장렬하게 맞서 싸우다 밀양성에서 순절함, 동년 10월 선조께서 공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어명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석구를 갖추고 제전(祭田)을 수여하고 수호인을 두어 묘역을 보호토록 하였음. 당시 함께 싸우다 전사한 군관과 막하동지 6명을 공의 묘지에 속장(모두 10기)토록 선조께서 허락하시었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5구만 남아있고 당시 석비(石碑)를 세웠으나 왜정시대 일본인들이 비문을 읽어보고 깨트려 버렸다고 전함. 1975년 국비를 들여 묘역정화 사업시 막하동지의 봉분속에서 오래된 나무토막이 출토되었다고 전하고 있음.

허수익(許守益)

: 1593년(선조27)에 무과에 합격하였음. 수문장이되어 임진왜란때 왜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형(兄)‘ 수겸’과 같이 왕(王)이 의주로 몽진하였을 때 왕을 호위하여 임란극복에 공을 세웠음. 그 공으로 참청난공신(參淸難功臣)이 되었음.

허수겸(許守謙)

: 김해 허씨로 봉강면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이옥(而玉)임. 1588년(선조21)에 과거에 합격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로 몽진할 때 동생‘수익’과 함께 왕을 호위하여 임란극복에 공이 컸음. 그 공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승진되었다가 강진현감이 되었으며 1605년 청난공일등(淸難功一等)이 되었고,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연임한 뒤 나이가 많아 물러나와 비봉산 밑에서 후학을 가르쳤음.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의 추증을 받았음.

이광악(李光岳)

: 전라병사(全羅兵使)로서 1597년(선조30) 12월 18일에 왜병들이 점령하고 있던 광양 탈환전을 벌린 장령(將領)이었음. 18일 밤에 광양성을 포위 하자 순천 왜교성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대부대가 구원하여 아군의 측면을 공격하므로 아군은 패하여 흩어지기 시작했음. 이때 구례현감 김응서(金應西)가 전사하였음. 이광악은 적의 군기를 민가에 세워 적을 유인하여 치기도 하고, 아군에게 왜군의 군복을 입혀 유격전을 벌리기도 하며, 지리를 이용하여 기습전을 벌리기도 하는 등, 격동격서(擊東擊西)로 허실의 묘(妙)를 다하여 크게 격파하자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왜군이 광양에서 왜교(倭橋)로 모두 철수하고 말았음.(이광악은 광양사람은 아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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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운문화지』4호. 1988년3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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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역증보문헌비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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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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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독립유공자공훈록명단』(국가보훈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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