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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물학행(學行, 현대인물 포함)

분류 : 조선시대의 인물

간략설명 : [조선시대의 인물] 학행(學行, 현대인물 포함)

학행(學行, 현대인물 포함)

강처중(姜處中)

진주 정씨로 호(號)는 백암(柏庵).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를 숙독하여 덕망이높고 문장이 출중하였음. 후세 교육에 공헌하였으며 저서로는『유년하습』∙『인물총논』∙『동국약사』등이 있음. (진월면 망덕리)

강삼회(姜三會)

진주 정씨로 호는 봉암(鳳庵). 천성이 단정하고 중후하였으며 지조가 굳고 발랐음. 학문이 깊어 후세교육에 일생을 바쳤음. (봉강면 봉당리)

김정화(金正華)

‘ 신득구’의문하(門下)로지조와실천력이독실하고학문과바른삶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음.

김상학(金商鶴)

1857년 진월면 구동 출신. 호는 운계(雲溪). 세칭 금안처사(今安處士)라 하였고 한학자로 시문학에 능통하였으며 중후하고 용모단정하며 모든 경서에 막힘이 없었으며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쳤음.

김홍섭(金洪攝)

경주 김씨로 호는 남파(藍坡). 본성이 근엄하고 중후하여 삼림(森林)속에 들어가 산수(山水)와 풍월(風月)로 낙을삼고 밤을 새우면서 시(詩)를 지어 시집(詩集)을 발간하였음.

김형두(金炯斗)

김령 김씨로 호는 석우(石愚). 재기가 넘쳐 어려서부터 사서(四書)를 깊이 읽어 후생교육에 전념하였음. 세속처사로『석우문집(石愚文集)』이 있음.(진월면 돈탁)

김용수(金容洙)

김해 김씨로 호는 운강(雲岡). 자손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도록 가르쳐 실천케 하므로 향민들이 앙모하였음.

김창현(金唱鉉)

광산 김씨로 호는 월은(月隱). 성품이 순후(純厚)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며 예의가 바르고 자선심(慈善心)이 많아 이웃에 가난한 백성들의 체납한 호세(戶稅)를 대납하여 주었고 향교(鄕校)를 중수(重修)하기도 하였음.

김여익(金汝瀷)

김해 김씨로 청주에 살다가 태인도(太仁島)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해의(海衣)양식을처음발명하였음「. 제8편5장1절문화유산개관참조」

김휴하(金休河)

김해 김씨로 호는 단천(丹川). 청빈한 가운데 독서를 즐겨 많은 저서와 글을 남겼음.

김규석(金珪錫)

경주 김씨로 호는 옥천(玉川). 재예(才藝)가 뛰어나고 탁월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명리를 구하지 않고 선행을 하였음.

나은집(羅恩集)

나주 나씨로 호는 낙산재(樂山齋). 천성이 강직하여 의리로 살았고 학행이 출중하여 유생들의 선구적 사인(士人)으로 추대되었음.(옥룡면 추산리)

문현모(文顯模)

전간(田艮)선생에게 글을 배워 강론(講論)과 예설(禮說)이 깊이를 얻어 학문과 도량이 범상(凡常)하였음.

박정일(朴禎一)

봉강면 석평 출신. 호는 솔성재. 봉강면 부저마을 암서와에서 후대면학을 위해 평생수학하였으며 중용(中庸)을 깊이 탐독하였으며 많은 시를 지어 자손과 후진들을 가르쳤음. 효행이 지극하여 모친이 위독하자 단지주혈을 하였음.

박계만(朴啓晩)

함양 박씨로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덕성이 인애하고 부모에게 지효(至孝)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음.

박종범(朴鍾凡)

1898년 진월면 용소 출신. 밀양인 호는 우당. 1969년 전국백일장에서 한시장원 대통령상 수상. 천성이 근후하고 재예가 있어 시문통달하며 각처 백일장에서 시관으로 추대. 희양문헌집 4권을 저술하였으며 광양향교 제18대 전교를 역임하였음.

박세래(朴世來)

1907년 광양읍 대실 출신. 제10대 옥곡면장. 시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저로 죽헌 시문집(竹軒詩文集)1권을 남겼음.

박현모(朴賢模)

1880년 봉강면 하봉 출신. 상산 박씨로 호는 완재(緩齋). 오경오서(五經五書)에 달통하여 완재집(緩齋集)을 남겼으며 희양십경의 저자임.

박희권(朴熙權)

1851년 봉강면 봉계출신. 호는 술제(述齊), 광양고을 최초의 근대교육자. 1906년경 광양향교내에 사립광명학교 설립∙운영하였으며 상봉마을에 거연정을 짓고 제자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는데 진력함.

박형규(朴亨圭)

상주 박씨로 사서(四書)를 달통하고 후진양성에 전력하였음. (봉강면 부저리)

박준(朴潗)

상산 박씨로 호는 만학(晩學). 송강재(宋剛齋)의 문인으로 늦게 배워 만학당(晩學堂)이라는 호를 얻었음.

박필래(朴弼來)

밀양 박씨로 호는 오봉(五峯). 백운정사(白雲精舍)를 짓고 후진양성을하였다. 많은 저서가 있음.

박인규(朴仁圭)

밀양 박씨로 호는 춘강(春岡). 자손들을 시서(詩書)로 교훈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벗에게 믿음을, 그리고 성현을 경모하여 성묘(聖廟)를 중수(重修)하였음.

박종수(朴種洙)

밀양 박씨로 호는 송암(松). 부모에게 효도하며 예를 존중하고, 흉년을 당하여 이웃을 적극 도와‘현자의 길’을 걸었음.

서현하(徐顯夏)

이천 서씨로 호는 만재(晩齋). 천성이 순수하고 말이 적으며 효우질직(孝友質直)하여 장자(長子)의 풍모를 흠모하고,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여 존덕성(尊德性)의 도(道)를 기리고 집에서도 늘 외우고 자손들에게 가르쳤음.

서극수(徐克綏)

이천 서씨로 주부(主簿)였으며 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음. 최산두(崔山斗)를 가르쳤고, 뒷날 그를 사위로 삼았음.

서천일(徐千鎰)

1483년 옥룡면 갈곡 출신. 서극수의 아들이고 최산두의 처남. 조선 중 종때 행의(行義: 바른 길만을 행하는 사람)로 천거되어 군자감주부(君資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광양읍 계곡, 동천변에 암연정(岩淵亭)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음. 윤선도가 옥룡추산으로 유배를 오자 자주 만나 학문을 논하였음.

서경흠(徐慶欽)

이천 서씨로 호는 석포(石圃). 효우위선(孝友爲先)하고 성(誠)을 다하여 품행을 가지런히 하며 자손들에게 늘 의(義)로움과 가난한 이웃을 도울 것을 가르쳤음.

송정호(宋廷浩)

1830년 봉강면 서석 출신. 호는 석서(石西), 시문과 한문학으로 저명. 황매천이 유년시절에 사사한 스승

송하섭(宋夏燮)

1875년, 봉강면 서석 출신. 호는 서파(西坡). 자는 자행(子行), 성품이 강직하고 학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후학양성에 크게 기여함. 매천황현 선생과 친밀한 세교를 유지. 매천의 시풍과 시맥을 광양에 전파했다고 전하며 매천시집에 그의 작품 여러수가 실려전함. 광양향교 제2대 전교를 지냈음.

송식(宋植)

봉강면 부암 출신. 여산 송씨로 호는 춘계(春溪). 문행소(文行素)라는 시를 짓고 철석같은 굳은 마음으로 학문에 열중하고, 달빛아래 글을 짓는 생각과 구상에 항상 깊이 몰두하였음.

송치규(宋穉圭)

호는 강재(剛齋). 봉강 출신. 학행으로 유명하며 1828년에 봉양사 사적비문을 썼음. 솔성재(率性齋) 박정일(朴禎一)이 그의 문하생임

우재혁(禹栽赫)

1829년 골약동 황방 출신. 1880년에 사재로 서당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2월 1일~5월말, 10월 1일~12월말까지 2회 정기적으로 한학을 가르쳤음. 특히 외지에서 온 학생들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였으며 그 당시 학생수는 50명~100명 정도이며 더욱이 그 당시 곤궁한 시대인데도 향토교육에 공헌이 컸음.

이이령(李以齡)

전주 이씨로 경서(經書)에 능통하고 예술(藝術)에 폭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음.

이돈모(李敦模)

1888년 봉강면 당저 출신. 호는 근재, 품행이 바르고 후세들의 학문연마에 기여함. 유고집으로 근재집을 남김.

이준모(李準模)

1888년 봉강면 당저 출신. 전주 이씨로 호는 우재(愚齋). 과묵하고 효자였으며 송윤재(松潤齋)를 짓고, 성학(聖學)을 탐구하고 덕성을 함양하며 제자들을 길렀음. 유고집으로는『우재시고(愚齋詩稿)』가 있음.

이현모(李賢模)

1891년 봉강면 당저 출신.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고집으로 완재집을 남김. 광양향교 제15대 전교를 역임함.

이학수(李鶴洙)

1854년 광양읍 인서 출신. 전주 이씨로 호는 운사(雲蓑), 자는 중구(仲九). 사친이효하고 의리가 있으며 문장에 능하여 많은 시문을 남김.

이복익(李復翊)

전주 이씨로 인조조때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제수받았으나 조용히 물러나와 봉산(鳳山)에서 밭갈고 글을 읽으며 의롭게 살았음.

이병무(李秉懋)

경주 이씨로 호는 백우(白遇). 붓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필세(筆勢)가 강건하고 전자(篆字)를 잘썼음.

이승록

전주 이씨로 호는 운은(雲隱). 성품이 온후(溫厚), 효우(孝友)하고, 가난한 이웃을 널리 도왔으며, 자손들에게도 구휼(救恤)을 계승시켰음.

양철인(楊徹仁)

봉강면 영수 출신. 청주 양씨로 호는 소봉(小峯). 학행으로 유명하며『팔성승조작록(八城勝朝爵綠)』이 있고, 『삼봉경윤(三封徑綸)』『지재안민책(只在安民策)』등 많은 저서가 있음.

정원구(鄭院龜)

1635년옥곡면의암출신. 생원∙문행으로유명함.‘ 희양팔경’을지어 향토지에 기록되어 전함. 「정진사문집」을 남겼는데 당시(1600년대)송천사의 사세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음.

정수구(鄭壽龜)

봉강면 필동 출신. 진주 정씨로 호는 성계(星溪). 우암선생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선생의 문하생으로 학문이 깊고 천성이 조용하며 지조가 굳고 학행으로 유명함.(8대손, 봉강면 조령리 정기)

송연제(宋淵齊)

조선말 유명한 한학자. 문하생으로 술제(述齊) 박희권(朴熙權)이 있음.

정우진(鄭佑晉)

진주 정씨로 이재(李縡)선생의 문하생으로 그 가풍을 승계 하여 경서(經書)를 탐구하고 예절을 바로 하며 세속에 들뜨지 않았음.

정윤화(鄭潤和)

1857년 진월면 구동 출신. 진주 정씨로 호는 석계(石溪). 서당을 개설하여 후진양성에 일생을 보냈음.

황면기(黃勉基)

1773년 진상면 비촌 출신. 창원 황씨로 자(字)는 화경(華卿), 호는 청계당(聽溪堂)임. 1807년(순조7)에 생원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계속 글을 배워‘청계당’이라는 호를 얻었음. 학문이 뛰어나며 성담 송환기 선생에게 수학하였으며 면암 최익현선생이 이분의 행적을 찬양하였으며 신황마을에 이분의 호를 딴 청계당이 있음.

황병중(黃炳中)

1871년 진상 비촌 출신. 창원 황씨로 호는 고암(鼓岩). 항일독립투사인 황병학(黃炳學. 1876~1931)의 장형으로 유림의 학자. 출신고을인 비촌마을에 운수장(雲水莊)이라는 고암서실(鼓岩書室)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고암집초(鼓岩集抄)를 남겼는데 특히 1924년 한여름에 지은 오로대기(午露臺記)가 전함.

허억부(許億富)

김해 허씨로 호는 소암(素庵). 최산두(崔山斗) 선생의 문하생으로 문장(文章)이 뛰어 났으나,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고 후생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음.
※ 참고문헌
1.『 광양군지』. 1983년12월30일
2.『 광양군지』. 1924년12월20일
3.『 광양향교지』. 1955년1월10일
4.『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년12월30일
5.『 백운문화지』4호. 1988년3월21일
6.『 전남도지』2∙3∙30권. 1968년5월
7.『 국역증보문헌비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8.『 호남읍지』권9. 전남대학교구사교육과. 1871년
9. 이영빈.『 전국지리지총서』. 한국학문헌연구소. 1983년2월10일
10. 안종화.『 국조인물지』
11.『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12. 이홍직.『 국사대사전』. 1999년6월10일
13.『 계간대동문화』(2001년광양통권)
14.『 독립유공자공훈록명단』(국가보훈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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